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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와 메신저

by 윤해



2024.05.28

사람들이 사는 자연에서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전후좌우, 사방팔방, 동서남북, 춘하추동과 같이 공간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자연이 주는 메시지에 집중할 뿐이다.

메시지에 집중한다는 것은 손과 함께 양쪽귀를 통해 자연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듣고 종합하는 제3의 귀, 뇌까지 총동원하여 판단까지 마친 다음 그제야 손을 사용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메시지에 집중하는 자연에 사는 사람은 섭리(攝理)에 따라 행동한다고 하는 것이다.

우주의 섭리(攝理)가 지배하는 자연에서 빠져나온 우리가 세상을 만들고 인간으로서 살다 보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배경이 생기며 배경은 비빌 언덕이 되면서 언덕 원을 쓰는 원리(原理)의 세계로 진입하고 그러한 세상에서는 어떤 정보, 즉 메시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누가 말한, 즉 메신저가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가 양쪽 귀로 자연의 소리, 즉 메시지를 듣고 제3의 귀, 뇌로 종합하여 손으로 행동하는 행위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생존할 수 있는 기본임에도 세상을 만들어 인간으로 살아가다 보면 자연의 섭리(攝理)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세상이 만든 배경, 즉 원리(原理)를 금과옥조처럼 따르고 그 부자유스러운 원리(原理)를 만든 인간에게 집착하여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를 신봉하고 그 결과 자연의 섭리는 세상의 원리(原理)를 수행하는 데 걸림돌쯤으로 치부되기가 쉬운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사는 사람으로서는 이미 완전한 존재이다. 즉 섭리(攝理)에 따라 행동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완성되고 전인적 존재가 바로 우리 사람이다.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나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인간 세상에서의 생존경쟁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서의 생존경쟁은 누구는 비빌 언덕을 받치고 서 있고 누구는 비빌 언덕 하나 없이 적수공권으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언덕에 깔려 그 언덕을 치우는데 한 생을 소모하기가 십상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언덕이라는 세상의 원리(原理)를 자연의 섭리하나 믿고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헤쳐나가느냐가 불합리한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이 완벽한 인간으로 변화되는 과정이며 이것이 바로 인생인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섭리(攝理)와 세상의 원리(原理)는 서로 충돌한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사람과 완벽한 인간도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숙명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연에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한 고리를 살아가게 되며 섭리(攝理)와 원리(原理 ) 사이에서 온갖 희로애락을 맛보며 섭리(攝理)가 깨어지면 두려움을 맛보고 원리(原理)가 무너지면 공포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미 완전하게 태어난 우리가 두려움과 공포를 만나는 세상을 만나면 세상이 만든 갖가지 장해가 넘고 넘어야 할 언덕으로 다가오고 그 언덕을 넘기 위해서 나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메신저와 만나게 되고 이렇게 만난 메신저의 자질구레하고 위선으로 범벅된 말을 찰떡같이 믿고 자연의 섭리(攝理)는 꺼마득히 잊어가는 모습이 세상을 사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어쩌면 단순하다. 신나게 즐기고 결과를 달게 받으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세상의 메신저가 우리에게 하는 말은 복잡 다난하다. 내가 법을 세워 밥을 주는 것만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원리(原理) 임을 끊임없이 가스라이팅 하면서 원리(原理)로 섭리를 덮는 것이다.

메시지가 아닌 메신저에 집중하는 공포를 이겨낼 때 우리는 섭리(攝理)와 원리(原理)가 서로 충돌하고 상충하지 않고 메시지와 같은 섭리를 전달하는 자, 메신저를 섭리로 혼동하지 않는 멋진 한 생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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