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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생식, 그 장엄한 드라마

by 윤해



2024.04.16

생명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학자들은 과학자라는 그들의 직분과 같이 물질을 나누고 또 나누어 최소단위까지 나누어 근원에 다가가듯 생명도 최소단위까지 나누면 반드시 생명의 기원을 알아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우주의 넓이, 우주의 깊이, 우주의 시간만큼이나 아득한 생명의 기원은 우선 생명의 정의가 무엇인가라는 명제부터 해결해야만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을 우리 인간이라는 인식체계 안에 가두어 두는 순간 우리는 생명에 대한 오류가 시작되고 , 인간의 인식체계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또 사유를 할 수 있는 몸을 잃어버리니 이것이 참으로 딱한 죄수의 딜레마 같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결국 인간의 관점에서 생명의 기원을 추적하는 자연스러운 경로를 따르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생명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학자들은 일단 생명이라고 하는 것의 최소단위를 수학적 가정에 의해 세웠으며 그 최소단위의 끊임없는 배열과 결합을 통해 monomer가 polymer로 바뀌는 과정을 생명이라고 정의했다. 즉 다시 말하면 생명현상은 분자의 배열, 아미노산의 배열, 단백질의 분포이다. 즉 단백질의 배열이 우리 몸의 기본 패턴을 만든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다 이겠는가? 인간의 인식체계 밖에 존재하는 생명은 없는 것인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은 어쩌면 다 생명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암흑에도 생명이 있고 진공도 생명이며, 더 좁혀보면 지구도 생명이며 지구 안에 존재하는 모든 돌부리 하나 흙 한 줌에도 생명이 가득한 것이다. 다만 그들의 억겁 같은 시간과 우리의 찰나적 시간이 다를 뿐 생명이기는 매 한 가지이다. 그리고 더 기막힌 것은 우리 오감에 잡히는 생명이 반이라면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는 생명이 반이 있다는 상상만이 생명에 대한 실체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는 한가닥 지푸라기 같은 단서 아닐까? 즉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종교적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우리 인간은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생명은 생식을 통해 존재를 이어간다. 생식은 기본적으로 방법론에 불과하다. 우리 인간만 보더라도 불노불사의 해당계 생명체로 출발하였으나 지구 환경의 변화로 세포 내 미토콘트리아와 결합하여 산소를 받아들인 우리 세포는 그 대가로 산화되어 사멸하는 숙명을 받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성을 통한 유성생식으로 우리 존재를 유전자에 실어 대를 이어 생존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이다.

교미 중 수컷 거미를 잡아먹는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암컷 거미의 생식과정을 보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분노하기 전에 우주가 내어 놓은 생명은 그 생명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필요가 있다. 찰나와 같은 우리의 한 생도 어쩌면 몸과 마음을 바쳐 가정 밖에서 가족의 울타리를 지키는 껍데기 같은 남편이 있고 그 울타리 안에 대를 이어가는 가정의 알맹이인 자식과 안해가 있는 것이다. 수컷 거미와 같은 운명을 우리의 숙명으로 체념하고 받아들인다면 생명과 생식이라는 우주의 드라마가 사랑과 전쟁이 아닌 그야말로 장엄한 한 편의 대하드라마로 상영될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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