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2
누구나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인생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별과 같은 타인의 인생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면서 주관이 객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은 개별인간이 주인(Owner)으로서 존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주인이 되지 못한 하수인에게 오로지 주인정신(Ownership)으로 살 것을 강요하는 모순적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먹고 먹히는 포식과 피식만이 존재하는 자연의 먹이사슬 가운데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원시인류의 뇌리 속에는 주인으로서 살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는 자연의 섭리를 뼈저리게 절감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을 것이다.
이러한 뿌리 깊은 야생의 주인이 자연에서 빠져나와 정주를 하게 되면서 인공의 세상과 마주하게 되고 세상 속의 인간이 되면서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구조적 한계와 만나고 관계와 관계 속에서 나름의 묘안을 찾아낸 것이 주인정신(Ownership)이라는 추상명사를 세상 속 개별인간에게 이미지로 각인시켰다.
이처럼 주인과 주인정신은 실상과 가상처럼 결이 다르다. 주인은 그 자체로서 자기 결정권과 생존본능 속에서 주인으로 살지 않으면 바로 도태되어 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주인이 아닌 하수인에게 주인정신을 심어준다는 것은 강력한 세뇌와 그에 대한 부작용으로 인지부조화라는 헷갈림이 반드시 생겨난다.
우리가 만든 세상은 이처럼 주인과 주인정신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장소이다. 세상 안에서 어떤 인간과 어떤 일을 도모하여도 상하가 나뉘고 피아가 구분되며 주종이 성립되는 세상에서 누가 주인인지 아닌지는 바로 드러나지만 누가 주인정신을 가지고 사는지 누가 노예근성으로 사는지는 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노예근성을 가진 인간이 주인정신으로 사는 사람을 매도하기도 하고 주인의 위치에서 노예근성으로 사는 인간도 허다하며 비록 하수인의 위치에서도 주인정신으로 생활하는 사람도 많은 것을 보면 세상은 위장과 갈등이 교묘하게 교차되면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곳이라는 확신이 든다.
1919년 3.1 독립운동의 열화와 같은 민중의 주인정신을 생생히 목도하면서 수립된 상해임시정부의 국호가 도로 조선도 아니고 도로 고려도 아니며 더욱이 일제에 의해 망한 도로 대한제국도 아니고 대한민국으로 정해진 것은 주인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어야 했을 대한제국의 황제가 일제에 나라를 들어 통째로 갖다 바치는 망국이라는 미증유의 경술국치 앞에서 무력했던 백성들의 한이 모여 새로운 나라는 일개 혼군의 노예근성에 좌지우지되어서는 안된다는 염원이 모여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의 국호가 정해졌던 것이다.
역사는 정반합이라는 리듬을 가지고 흘러가듯이 1948년 8월 15일 UN의 승인하에 수립된 우리 대한민국도 주인과 주인정신 노예와 노예정신이 얼버무려 혼재되어 있으며 조건만 무르익으면 판도라의 상자처럼 언제든지 밖으로 튀어나올 준비가 되어있으며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활짝 열려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원리는 이처럼 위장과 복선으로 가득 차 있다. 독재는 지속가능한 국민생활의 복리증대를 가져왔고 민주는 탐욕과 노예근성으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듯이 주인은 어디 가고 없고 주인정신이라는 위장구호만 가득한 세상 속에서 그래도 사필귀정으로 정리될 것이라는 판도라의 희망에 희망을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