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인류는 수십만 년 간 살았던 나무에서 내려올 때 한 사람 씩 숲에서 빠져나와 사바나를 향해 백 걸음을 옮긴 것이 아니라 백사람이 모일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가 한 걸음 씩을 옮겼다.
이처럼 한 사람의 백 걸음과 백사람의 한걸음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출발하는 것이다.
인류는 사바나를 향해 한 사람이 따로따로 백 걸음을 치고 나갔다면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사바나에서 우글거리던 맹수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맹수들의 한 끼 식사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백사람이 모여 다 같이 조심스럽게 사바나로 한 발자국 씩 옮기게 된 우리 인류의 위대한 전진의 전제는 늘 네 옆에 내가 있고 네 뒤에 내가 있다는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우리 인류는 결코 전 지구로 퍼져나갈 수도 없었고 지혜자로서 호모 사피엔스는 결코 만들어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밀림에서 빠져나와 문명을 이루고 생존한다는 의미는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죽고 죽이는 만인이 만인을 향한 약육강식의 밀림의 본능에서 빠져나와 네 옆에 내가 있고 내 뒤에 네가 지켜주는 믿음이 무리를 만들어 태산 같은 의리로 세상의 원리가 작동될 때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무리는 본능을 넘어서는 의리를 지켜냄으로써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어 자연의 섭리를 극복하는 문명이라는 일종의 가상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게 시작한 우리 인류에게 있어 무리 안에서 동무와 친구 나아가 어릴 적부터 서로 홀딱 벗고 뛰어놀던 벗이라는 존재는 그 어떤 관계보다 각별하고 끈끈한 사이이고 관계라는 것은 부정될 수 없다.
나이를 먹지 않는 유일한 동물이 친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친구를 만나면 일단 즐겁다.
즐거워서 즐거운 것이 아니라 네 옆에 내가 있고 내 뒤에 네가 있다는 원초적인 든든함이 우리들의 기분을 지배하고 흐를 때 우리는 무리를 통해 동무를 느끼고 동무가 발전되어 친구가 되며 추억을 기반으로 벗이 되어 우정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바나의 기억 안에서 뛰어놀던 친구는 그때 그 사람이지만 추억 속에서 깨어난 우리는 국가라는 울타리 사회라는 울타리 가정이라는 울타리, 즉 우리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 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에 가고자 무리를 하는 무리 안에 있는 순수한 무리가 아닌 목적지향적 무리 안에 갇힌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이처럼 나이가 든다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울타리에 갇힌다는 것이다. 울타리라고 하는 우리에 갇히면 일단 활동반경이 줄어들고 더 이상 무리 지어 다니지 않고 무리 지어 다니지 않으니 점점 더 내 옆을 함께할 친구도 네 뒤를 지켜줄 벗도 절실하지 않게 된다. 즉 세월이 친구마저 자연스럽게 정리해 주는 서글픈 현실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조각조각난 우정의 조각보를 끼워 맞추듯이 세월과 함께 사라진 시험에 든 벗과의 우정에 너무 빠지지도 말고 삐지지도 말며 따지지도 않는 빠삐따를 구호 삼아 하루하루 살다 보면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아', 뜻을 같이 하는 친구가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군자삼락을 말씀하신 공자님의 즐거움을 몸소 느끼고 실천하는 친구들이 많게 되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가만히 중얼거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