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어느 고즈넉하고 조용한 날 강원도 최북단 GOP 통문의 철책문이 쇳소리를 내면서 무겁게 열리고 금강산이 동해를 만나 떨어지기 직전의 해금강이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동부전선 최북단의 GP로 가는 길은 비무장지대(DMZ)라는 말이 무색하게 양쪽 좌우로 민정경찰이라는 마크가 선명한 완장을 찬 완전무장한 수색대의 사주정찰 속에서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뢰를 피해 조심스럽게 이동해 나갔다.
금강산 자락 어느 줄기인지도 모르는 산등성이 높은 곳에 구름도 넘어가다 걸려 있는 GP의 첫인상은 마치 외따로 홀로 고립되어 있는 자그마한 성채인지 산채인지도 모를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지만 그곳에는 오로지 국가에 대한 애국심 하나로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GP에서 반년을 버텨내야 하는 장병들의 말똥말똥한 눈망울 하나하나만큼은 40여 년이 지나가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GP의 새벽은 구름바다, 운해로 가득 차 있다. 사방팔방 구름 위에 둥둥 떠있는 듯한 착각은 해금강 너머 진짜 바다, 동해의 일출이 장엄한 햇살을 GP로 비추고서야 운해는 일출직전의 태양풍과 함께 사라지고 GP는 그 위태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GP에서 올려다본 파란 창공에는 이름도 모르는 철새들만 인간들이 쳐놓은 경계가 우습다는 듯이 왔다 갔다 하면서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넘나들고 때 마침 들려오는 남북한 군인들의 실탄 시험사격 소리에 깜짝 놀라 이곳이 남북 대치의 한가운데에 있음을 실감한다.
아무르 강가에서 1000킬로미터를 날아와 DMZ를 굽어보다 6.25 한국전쟁사의 최대 고지전 백마고지를 넘어 철원평야에 사뿐히 내려앉은 재두루미 철새 무리에게서는 치열한 고지전의 와중에서 희생된 군인들이 흩뿌린 피의 능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추수가 끝난 철원평야 논에 떨어진 나락 한 톨이 귀하디 귀한 것이다.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공산권과 자유진영의 치열한 경계가 되어 평화와 긴장이 교차된 지도 70여 년이 지나가지만 휴전이 종전이 되기보다 남북간의 확전으로 치닫고 있는 현실에서 마치 살얼음을 걷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안타까움을 넘어 위태로움과 공포에 이은 무력감까지 함께 느껴진다.
여우집에 놀러 온 두루미에게 여우가 내어 놓은 수프가 납작한 접시에 담겨 있다면 식사 초대에 응한 두루미는 뾰족한 부리로 접시에 올려진 수프를 하나도 먹을 수 없듯이 남북한이 직면한 문제도 70여 년의 체제경쟁 속에서 여우의 주둥이와 두루미의 부리 만큼의 뚜렷한 차이로 인해 남북한이 가용할 수 있는 수단과 지향점이 달라졌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을 해야지 남북간의 꼬인 난제를 풀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여우인지 두루미인지도 모르는 남북이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 다른 식기로 서로 먹을 수 없는 수프를 내어놓는 악순환의 고리가 심해지는 동안 역사라는 정반합의 물결은 어느덧 신냉전으로 접어들어 이제는 여지가 없는 주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
아무르강 1000킬로미터를 날아온 재두루미에게 올여름 늦더위가 가을까지 늘어져 논밭에 떨어진 나락에 싹이 올라 무엇을 먹일지 걱정되는 철원평야의 늦가을이 어째 을씨년하기도 하고 폭풍전야처럼 고저넉 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