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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찰나의 선택이 가져올 장밋빛 미래

by 윤해



2024.05.31

순간, 찰나, 눈 깜짝할 사이라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짧은 순간 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없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우주 안에 있는 지구라는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어떤 대상 그대로의 모습 즉 실체를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태생적 한계 안에 우리 모두는 놓여있다.

실체를 영원히 볼 수 없는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고 하는 것은 실체가 아닌 실체의 모습을 실체보다 찰나적으로 지체 인식한 실체의 모습을 관념으로 인식한 환상을 보는 것이다.

환상을 보는 인간이 눈 깜짝할 사이, 즉 순간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세월이 한 생이다. 그래서 실체를 못 보고 환상만을 보고 산 인간이 생의 마지막에 내뱉는 독백이 허하고도 허하고 모든 것이 헛것이로다 라는 말이다.

여기서 허하고 헛것이다라는 말은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결국 한 세상 살면서 무수히 많은 것을 보고 살았지만 실체는 결국 보지 못하고 순간순간의 환상만 보았다는 깨달음의 말 아닐까? 유추해 본다.

카메라와 영상의 발명으로 드디어 인간은 순간을 극복하고 대상의 실체를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순간이라는 인간의 시간을 카메라 셔터라고 하는 기계가 대신했을 뿐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인간의 머리에 맺혀야 할 상을 카메라 조리개를 통해 필름에 투사한 또 다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환상이라는 실체를 볼 수 없는 인간의 굴레 속에도 실망하지 않고 그 나름대로의 문명과 법치를 이루어낸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두 갈래 선택이라는 자유의지를 부여받았다. 즉 장밋빛 환상과 잿빛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생과 사의 이정표라는 운명과 숙명을 가진 인간은 어떠한 순간에서도 자유의지로 그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선택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장밋빛 환상과 함께 나아갈 수도 있고, 반대로 밤낮으로 지나온 과거의 망령을 파고 또 파면서 반드시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는 시대착오적 이념이라는 잿빛 환상에 갇혀 현재라는 귀중한 선물을 걷어차면서 미래를 온통 잿빛 환상으로 채울 수도 있다.

세상은 늘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들로 인해 정말 1밀리미터 1밀리미터씩 앞으로 전진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그곳에는 억측과 비약이라는 도둑 심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실체를 볼 수 없는 순간 속에 인간이라는 몸을 입고 공간을 살아가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환상 같은 존재인 우리지만 그래도 우리 안에는 적어도 미래를 잿빛 환상으로 채울지 장밋빛 환상으로 바꿀지 정도의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지혜로운 자,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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