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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해 록] 백년전쟁 66, 브라운 각서 1966

by 윤해


브라운 각서란 1966년 3월 7일에 주한미국 대사 W. G. 브라운과 대한민국 정부의 이동원 외무부 장관 간에 체결한 각서이다. 정식 명칭은 《한국군 월남 증파에 따른 미국의 대한 협조에 관한 주한미대사 공한》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베트남 추가 파병을 조건으로 국가 안보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16개 항의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문서는 2005년 8월 26일 정부의 베트남전 관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자세히 알려졌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일필휘지一筆揮之의 서체는 1917년 11월생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정권을 잡고 조국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그가 한 모든 결정에 중심이 되는 모토였다.


자연의 섭리攝理는 손을 가지고 귀를 열어 천지인天地人의 소리를 듣기만 해도 자연이 우리를 키우지만 세상의 원리原理는 비빌 언덕이 있어야 언덕을 의지 삼아 구르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세상의 풍파를 헤쳐나가며 생존하는 법이다. 1950년대 미국의 원조물자에 기대어 겨우 연명하며 초토화된 강토를 복구할 엄두를 못 낸 것은 전후 남북한의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상호보완적이었던 남북한이 각자도생으로 달려갔고 산업적인 측면에서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했다.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라, 어려운 청을 할 때면 상대가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주면 고마우련만 인간관계는 물론 국제관계에서 이런 나이브 naive 한 생각보다는 인디언 기우제 같이 될 때까지 두드려 보는 것이 해결책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베트남 파병의 진실은 1차 인도차이나 전쟁시기부터 한국전쟁을 치른 우남은 미국 측에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꾸준히 제안했다는 사실이다.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아이크와 캐네디대통령은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하였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캐네디 암살 이후 대통령에 오른 존슨대통령에 의해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존슨 대통령은 케네디와 달리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하였다. 1964년 4월 기자회견을 통해 동맹국들에게 베트남 전쟁 참여와 지지를 요청하며 이른바 더 많은 깃발 정책 more flags campaign을 표방했다. 존슨 대통령의 '더 많은 깃발' 정책은 단순히 병력이 필요하여 추진된 정책이라기보다는, 자유진영 여러 국가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을 선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추진되었다. 결정적으로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고 미국 의회가 존슨 대통령에게 군사행동 권한을 부여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급격하게 변화한다. 미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 번디(William Bundy)가 한국 정부에 비전투부대에 국한된 파병 요청을 하게 되었고 그에 호응하여 1964년 9월 한국 정부는 130명의 이동외과병원 요원과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남베트남에 파병하는 1차 파병을 추진했다. 이후 한국과 미국 사이의 파병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1964년 12월 19일 브라운 대사는 박 대통령을 만나 존슨 대통령의 비전투 병력 파병 요청 메시지를 공식 전달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1965년 3월 2,000명 규모의 공병대 등 비전투 병력 비둘기부대를 파병했다.


이처럼 낙타가 현관문에 한 코 한 발 들여놓기로 시작된 베트남 파병은 식민지 청년으로 태어나 일제가 대륙침략의 전초 기지화한 만주국을 어떻게 경영하는가를 만주육사 시절 현장에서 생생히 경험한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대일 수교를 통해 일어나는 일본의 실세, 만주국 인맥과 손을 잡으면서 산업화의 마중물은 마련되었지만 대한민국의 체질을 바꾸고 오천 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큰 것 한방이 필요했다.


1908년 1월생은 대학강단에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동량들이 한일수교 반대 시위에 이어 베트남 파병 반대 데모로 날이 새고 해가 지는 대학가의 혼란한 현실 속에서도 거악의 일제 식민지 시절 자신처럼 좌절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일제의 심장부로 들어가 자강하고 실력을 기른 박정희가 일본이라는 마중물을 가지고 베트남 파병이라는 펌프를 우물에 설치하고 패권국 미국이라는 샘물을 펌프질 하여 대한민국 국토에 골고루 뿌리기 위해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는 동향의 후배를 보면서 망국의 시련 속에서도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1908년 6월생 매헌과 다르게 죽지 않고 살아난 죄인이 된 식민지 청년의 한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가슴이 찡했으며 베트남 파병이라는 대한민국 번영의 비빌 언덕을 마련한 박정희가 세워가는 세상의 원리 앞에서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망국을 막지 못하고 독립전쟁에 뛰어든 우남이 분단을 막지 못하고 건국된 대한민국을 위해 적수공권의 외교력 하나로 전후 패권질서의 파고를 헤쳐 나왔듯이 망국의 식민지 청년 출신 박정희는 가슴에 비수를 품고 일제로부터 배운 부국강병의 원리를 배우고 깨우쳐 1966년 베트남전의 수렁으로 들어간 슈퍼갑 패권국 미국을 상대로 스스로 슈퍼을이 되어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가두고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에 걸쳐 상시 5만 병력 규모의 한국군 총 30만 명을 파병하여 56만 3,387건의 작전을 수행하면서 5천여 명의 대한민국 청년들의 소중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대한민국 국가 안보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에 대한 16개 항에 달하는 요구조건에 덧붙여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초석이 될 KIST 설립까지 브라운 각서에 담겨있었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대한민국 산업화를 시작한 박정희의 실력과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브라운 각서라는 한 장의 서류는 세계를 향한 박정희의 출사표이자 대한민국 산업화의 출발이었다.


1966년 그 때나 2025년 지금이나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박정희의 역사적 공로 앞에서는 조용히 침묵하며 애써 그의 과오 만을 잔인하게 파고 있지는 않은 지 한번쯤 뒤돌아 봐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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