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유신 선포 두 달 전인 1972년 7월 17일 제헌절 경축사에서 박정희는 “대의제의 이름으로 비능률을 감수했던 적은 없는지… 자유만을 방종스럽게 주장한 나머지 사회기강의 확립마저 독재라고 모함하지 않았는지… 민주주의가 마치 분열과 파쟁을 뜻하는 것으로 본의 아니게 착각한 일은 없는지…”라고 10월 유신을 암시하는 연설을 하였다.
권불 10년이라고 역사적으로 어떠한 권력도 10년을 넘기기 힘들고 10년을 넘어가서도 안된다는 권력의 속성에 대한 통계학적 결론이며 권력에 대한 인간의 불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할 수밖에 없는 세상사에서 1961년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권력도 10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봄 여어르음 갈 겨어우을 이라는 2025년 한반도의 사계절을 잘 표현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봄과 가을에 대한 아쉬움, 뒤이어 다가오는 긴 무더위의 여름과 혹독한 폭풍한설의 겨울과 같이 비록 봄 여름 가을 겨울 제철을 딱딱 가려할 일을 하고 가는 철부지가 아닌 사람들도 찰나적으로 지나가는 좋은 계절 봄, 가을에 대한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다. 더구나 봄보다 만물이 죽은 듯이 사라지는 가을을 더구나 가을 중에도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시월에 대한 단상은 누구에게나 애잔하다.
1972년 박정희는 온 국민들이 10월의 감상에 빠져있을 때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사전적 의미의 10월 유신을 발표한다. 이미 3선 개헌을 통해 1971년 3 연임 대통령이 되었고 그의 임기는 1974년까지 보장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권불 10년을 넘긴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단행하고 유신헌법을 통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대권력을 구축하고자 했고 대한민국 국민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종신집권을 향한 박정희의 폭주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대한민국 국민 중에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망국과 독립, 건국과 전쟁이라는 격동의 세월을 겪어내고 민주화와 산업화의 영욕을 목격했던 1908년 1월생은 10월 유신을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위한 권력욕의 발현이라 매도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고 있는 야당과 대학생들의 치기 어린 단순함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전쟁의 열전을 넘어 이십여 년간 지속된 냉전의 파고는 베트남전 파병에 적극적이었던 존슨 미 대통령을 지나 베트남전 종전을 공약하고 아시아 국가의 전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주창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세계패권질서는 미소 냉전시대의 균열이 감지되고 있었으며 미 중간이 접근하는 신 데탕트 시대가 열리는 국제관계는 이합집산으로 재편되고 있었으며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과 회담하면서 냉전 완화의 징후를 보여주기도 했고 중일 국교 정상화도 이 해에 이루어졌다. 북한은 주석제를 신설한 헌법 개정에 따라 국가수반이 최용건에서 김일성으로 변경되었다. 또한 한국경제가 북한을 압도하기 시작하고 공업이 급속도로 고도화되고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1972년은 1월 24일 미국령 괌의 정글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항복을 거부했던 일본군 하사 요코이 쇼이치(横井 庄一)가 발견되었고 그는 전쟁이 아직 진행 중인 걸로 믿고 있었다. 1월 20일 석유수출국기구가 원유가를 8.49%나 인상했고, 5월 29일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박병선 박사에 의해 세계에서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발견되었다. 7월 4일 남북한 양국이 6.25 전쟁 이후 최초로 남북간 합의인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한다. 8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 명령(제15호)'을 발표했다. '8.3 사채 동결 조치'는 대기업집단이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8월 12일 미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완료하였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떼었다. 9월 5일 뮌헨 올림픽 개최 중 선수촌에 팔레스타인 PLO계 과격파 무장단체인 검은 9월단이 침입해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점거했다. 결국 이들은 무력으로 제압되어, 평화의 제전 올림픽은 피로 물들게 된다. 10월 3일 미국과 소련이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체결했다. 냉전 시기 미소의 첫 핵무기 제한 협정이다. 11월 11일 대남 및 대북방송이 24년 만에 중지되었다. 11월 21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투표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찬성률 91.5%의 압도적인 찬성률로 유신헌법이 승인되었으며 11월 22일 남북적십자회담 4차 본회담이 서울에서 열렸다.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직에 박정희를 선출하였다. 12월 27일 유신헌법이 제정됨과 동시에 박정희는 제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해 데니스 리치가 C언어를 창시했다.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고 하는 권력을 둘러싼 역사적 섭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식민지 청년출신의 전직교사이자 전직군인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통해 자신의 집권욕을 드러내었다는 세상의 오해와 억측을 뒤로하고 일모도원日暮途遠의 단심丹心으로 오천 년 가난을 벗어나 번영된 대한민국으로 달려갈 길은 먼데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마지막 열차가 박정희의 눈앞에 정차해 있고 이제 그 열차는 기적을 울리고 떠나가려 하는 데 눈앞의 이로움을 좇아 선동하는 무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침묵하는 다수에게 장밋빛 환상만을 심어주어 선진국행 막차에 한사코 올라타지 않으려고 방해하였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 마지막 한 사람까지도 낙오시키지 않고 함께 올라탈 기세의 박정희는 막차시간에 쫓겨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오고도행이 역시지吾故倒行而逆施之,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독백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박정희 곁에는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도 없이 그저 고육지책으로 산업화의 제단에 제 한 몸 투신하면서 세상의 비난과 질책을 한 몸에 뒤집어쓰며 역사의 멍에를 메고 걸어 들어가는 고독한 독재자가 되기를 조금도 마다하지 않고 유신헌법이라는 차표 한 장 들고 선진국으로 향하는 막차에 대한민국 국민들을 이끌고 어렵게 올라탄 것은 아니었는지? 군작群雀의 재잘거림은 사라지고 대붕大鵬의 날개가 세상을 뒤덮는 그런 세상은 언제 만날 수 있을는지?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저 무심하게 돌아가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라를 사랑한다는 의미의 무거움을 느낄 때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