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7
생로병사의 도정에 있는 우리는 하루하루 생명줄이 붙어있는 한 도와 덕의 희비쌍곡선을 타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이 심지어는 노도 없이 맨손으로 물을 헤치며 일엽편주에 의지한 체 떠내려 가고 있는 중이다.
폭풍우가 불 때도 있고 바람이 잔잔해져 한숨 돌리며 뱃전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쉴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쉴 새 없이 인생이라는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부모님에게서 인간이라는 몸을 입고 세상에 왔을 때는 도와 덕에 시절인연이라는 시간이 더해야 세상이라는 공간을 마주할 수가 있다. 태어나는 곳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듯이 살아가는 방법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나마 여백을 가진 후천 뇌를 이리저리 개발하면서 세상의 일원으로 생존하기 위해 분투노력한 결과가 우리가 세상에서 나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직과 업 즉 직업이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살기 위해 어떤 자리에 가려고 본능을 숨기고 노력을 하며 필요한 가지가지 스펙도 채우고 미래를 성실히 준비하면서 갖은 힘을 쏟는다.
어떤 이는 노력의 결실을 맺고 원하는 자리에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원하던 자리가 아닌 곳에 자리잡거나 아니면 자리를 못 잡고 떠 돌기도 한다.
자리를 잡은 직을 가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따라붙기 시작하는 것이 업이라고 하는 실타래이다. 너도 좋고 나도 좋아 서로가 하나 되는 일과 달리 업이라고 하는 것은 자리라는 직을 걸고 직을 지키기 위해 좋은 일뿐만 아니라 험한 일 궂은일을 손에 묻혀야 생존경쟁에서 그나마 쥐고 있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므로 대부분 영혼을 털어서라도 직을 지키고 욕망이 이끄는 데로 한 직급 한 직급 올라가기 위해 온 힘을 쏟기 마련이다.
이러한 자리싸움에서 반드시 수반되는 결과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본의 아니게 끼친 해악과 상처 같은 불안하고 찝찝한 찌꺼기가 따라오기 마련이며 이것을 악업이라 부르고 또 한편 직을 수행하며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선의를 베풀어 살맛 나는 세상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는 선업을 쌓기도 하며 이 선업과 악업이 더하기도 빼기도 하면서 우리가 맡은 자리 직에 따라붙는 업이 되고 비로소 직업이라는 글자가 완성되는 것이다.
시는 절 언어이자 산사의 말씀이다. 생존경쟁의 세파에 시달리며 세속에 찌들어 업장의 무게를 감당키 어려울 때 명산대찰을 찾아 업장소멸을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다만 시간과 환경이 허락되지 않아 주저주저할 뿐이다. 때가 되고 처지가 되면 우리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운 시를 암송하며 그동안 자기가 지나온 인생의 고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가 쌓아온 악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는 갈망이 들 것이다.
이때부터 우리는 더 이상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필요한 때 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은퇴, 생물학적 은퇴라는 강요된 퇴직에서 한 차원 성숙된 자발적 퇴직을 통해 진정 자기가 세상에 온 의미를 찾아서 그것을 직이 아닌 일로 삼아 삼매 할 때 우리는 비로소 업장소멸과 인생이라는 고해를 건너 진정한 자기를 찾는 자기만의 항구에 다다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