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1장_자각의 속도는 기술을 따라잡을 수 있는가

프로젝트 : 부메랑 _ 수백 년 만에 다시 필요하게 된 스스로의 자각

by rio


후회의 가치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인식과 판단에 시간이 걸린다.


신체는 느리게 반응하고, 사고 과정은 더욱 느리게 전개된다. 시각적 자극을 받아들이더라도 즉각적으로 믿지 않으며, 청각적 정보를 접하더라도 그것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데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이처럼 감각을 통한 수용과 판단 사이에는 필연적인 지연이 존재하며, 이러한 지연은 인간 특유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인공지능은 이 과정을 생략한다.


지각과 반응 사이의 간극을 제거하고, 입력에 대한 결과를 실시간으로 산출한다. 인간에게 제시되는 정보는 이미 분석이 완료된 형태이며, 그 내용은 흔히 ‘최적의 답안’으로 간주된다. 이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 질문을 구성하거나 판단의 여지를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비판적 검토나 의심의 단계 없이 결과를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감각적 판단은 점점 둔화되고, 인간 신체는 정보 처리 체계에서 중심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판단하지 않는 습관은 점차 일반화되며, 자율적 사고는 축소된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이 기술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단기적 반응만으로 세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거시적인 관점으로 인류학을 발전시켜 나간다.
기억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회고하고, 그 결과를 반성하며, 이를 기반으로 미래를 설계한다. 이러한 ‘시간의 확장성’은 인간 인식의 중요한 특징이다. 반면, 인공지능은 현재의 데이터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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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과거의 데이터를 활용해 예측을 생성할 수는 있지만, 그 데이터에 수반된 맥락적 의미나 사회적 결과에 대한 내적 성찰을 수행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오류를 수정할 수 있지만, 그 오류가 가져온 인간의 경험이나 고통을 기억하거나 고려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는 역사적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세기 중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이 통합을 모색한 것은, 단지 경제적 효율성을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당시 독일과 프랑스는 반복되는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적 연대를 형성했고, 이는 유럽연합(EU)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결정은 집단적 반성과 구조적 재설계를 동반한 결과였다.
만약 과거의 경험에 대한 회고와 그것이 낳은 고통의 인식이 없었다면, 동일한 갈등은 되풀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와 달리, AI는 유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학습할 수는 있지만, 그 실수가 초래한 비가시적인 사회적 손실이나 감정적 여파에 반응하지 않는다. AI가 주도하는 의사결정은 대체로 ‘지금’을 기반으로 작동하며, 과거의 경험을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그 경험을 기억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규범이나 윤리를 도출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인식 속도는 기술의 반응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고유한 대응 방식은 시간의 확장성과 연관되어 있다. 반성과 회고, 수정과 재구성의 과정은 기술이 모방하기 어려운 구조적 사고의 형태다. 특히 ‘후회’는 이러한 구조의 대표적인 사례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회적 판단을 촉진하고, 제도적 방향성을 수정하며, 윤리적 기준을 재정립하는 기능을 갖는다.

기술의 발전은 실시간 처리를 가능하게 하지만, 인간은 후회를 통해 미래를 설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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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오류를 기억하게 하고, 반복을 방지하도록 유도하며, 나아가 사회 전체의 방향성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속성은 단순히 효율을 기준으로 설계된 시스템과는 구별되며, 인간 중심적 사고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인간은 기술의 속도를 모방하거나 따라잡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판단의 간극, 회고의 유예, 그리고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구성할 수 있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지더라도, 후회를 인식하고 그 결과를 사회적 구조 속에 반영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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