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 부메랑 _ 수백 년 만에 다시 필요하게 된 스스로의 자각
새로운 철학의 조건은, 자동성의 세계에서조차 인간이 다시 주체로서 책임과 느림을 감각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
기술은 지속적으로 고속화되고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판단 과정을 대체하고 있으며,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는 환전과 거래를 초단위로 실행한다. 동시에, 제한된 발행량을 가진 비트코인은 가치의 축적을 통해 소수에게 권력을 집중시킨다. 이처럼 자동화된 기술 체계는 인간의 개입 가능성을 점점 축소시키고 있으며, 사용자들은 시스템이 내놓은 결과를 단순히 받아들이는 역할로 전환된다. 선택은 알고리즘이 수행하고, 그에 따른 책임은 명확한 주체 없이 분산되거나 사라진다. 기술은 통제를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실제로는 통제를 불가능하게 만들면서 사용자를 피동적인 존재로 위치시킨다.
이 현상은 단순히 시장에서의 불균형이나 경제적 격차의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자동화는 결과적으로 인간의 주체성과 판단 능력을 약화시키며, 사회적·윤리적 결정을 내리는 능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선택할 수 없는 구조에서는 자유의 의미가 모호해지며, 책임을 전가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시스템에서는 인간의 고유한 역할이 약화된다. 거래와 화폐는 사회 질서의 기본 단위로 기능해 왔지만, 그 영역에서조차 인간이 배제될 경우, 전체적인 사회 구조는 기계적인 질서에 종속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과거 봉건 사회에서 토지 소유가 권력의 기반이 되었듯, 디지털 자산 체계에서는 기술과 자본을 독점한 소수가 동일한 구조를 재현하고 있다. 외형만 바뀌었을 뿐, 권력의 집중과 결정의 비대칭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술적 전환기에 필요한 것은 기술에 대한 거부나 회피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기술의 흐름은 중단되지 않으며, 비판을 통해 멈출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 흐름 속에서 인간의 역할을 재정의하고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모색이다. 인공지능이 초단위로 움직이는 세계에서 인간은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연대와 협력을 통해 시간의 단위를 확장할 필요가 있으며, 무감각하게 반복되는 자동화된 선택의 환경 속에서는 비가시적인 윤리 기준을 통해 균형을 조정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전통적인 격언인 “돌다리도 두들겨보라”는 문장은 단순히 조심성을 강조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을 다루기 위한 인간의 합리적 판단과 위험 관리의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대, 2020년대 세계적 팬데믹과 기후 위기 상황에서, 각국 정부와 민간 재단, 그리고 개인 차원에서 발생한 자발적 기부나 협력의 움직임은 자동화된 시스템이 설계할 수 없는 복잡한 가치 판단의 결과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인간 사회가 기술 기반 의사결정 체계 외부에서도 작동할 수 있는 윤리적 구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술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설정해야 할 새로운 철학적 조건은 명확하다.
속도에 기반한 자동화 시스템이 아닌, 판단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인간 중심 구조를 회복하는 것이다.
기술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 능력과 공동체적 책무를 확장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이는 기술 발전을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기술을 방향성 있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초적 전제이다.
결국에는 하나의 핵심적인 질문이 남는다.
인공지능이 수행하는 자동화가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대체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인공지능이 가진 자동성에 윤리적 기준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미래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의 기술적 전환 상황에서 사회가 반드시 응답해야 할 과제다. 이 글의 종장은 하나의 결론이라기보다는, 3부로 이어질 보다 구조적이고 윤리적인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기능한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인간은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기술적 세계-파악 속에 이미 서 있는 존재다. 그러나 그는 또한 ‘위험이 있는 곳에, 구원도 자란다’고 했다. 자동성의 위험 속에서야말로 새로운 철학의 조건은 태어나며, 그 조건은 인간이 다시금 주체로서 윤리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의 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