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장_봉건제로의 회귀, 새로운 영주, 디지털 화폐

프로젝트 : 부메랑 _ 수백 년 만에 다시 필요하게 된 스스로의 자각

by rio

빛 좋은 개살구



디지털 화폐는 표면적으로 투명성과 편리성을 약속한다. 전 세계 어디서나 즉시 결제 가능하고, 위조와 분실 위험이 없으며, 기록은 영구히 보관된다. 하지만 그 빛나는 표면 아래에는 소유와 통제의 극단적 편중이 숨어 있다. 물량을 장악한 소수와 이를 설계·운영하는 집단이 경제 흐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구조, 그리고 AI가 실시간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메커니즘은, 일반인의 경제적 자율성을 서서히 잠식한다.

결국 이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겉은 황금빛이지만, 속은 이미 권력 독점과 불평등이라는 씨앗으로 썩어가고 있다.


비트코인은 총 2,100만 개라는 고정된 발행량을 가진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이 한계는 희소성을 보장하며, 통화 팽창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공급의 한계는 또 다른 형태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초기 채굴자와 대규모 보유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통되는 비트코인의 양이 줄어드는 시스템 속에서 상대적으로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된다.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토지는 생존의 기반이자 권력의 원천이었다. 토지를 보유한 영주는 생산수단을 통제했고, 이에 의존하는 농노의 삶은 그 경계 안에 갇혀 있었다. 비트코인을 중심으로 하는 21세기 디지털 화폐 체계에서, 이 관계는 비트코인 지분이라는 형태로 재구성된다. 소유권은 디지털 지갑 주소와 다중 서명 인증, 그리고 자동화된 거래 알고리즘이라는 장벽을 통해 유지되며, 그 접근은 제한적이다.


이 구조가 CBDC 및 스테이블코인과 결합될 경우, 통화 시스템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무제한에 가까운 공급이 가능한 CBDC는 AI 기반 환율 및 세율 알고리즘을 통해 비트코인과 연동되며 교환된다. 표면적으로는 시장 논리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규모 보유자의 이해관계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한다. 이때 비트코인은 단순한 디지털 자산을 넘어, 자산 흐름과 자원의 분배를 통제하는 일종의 ‘허가증’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다수의 개인이 화폐를 '보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을 '허가'받는 형태로 전환된다. 화폐가 디지털 코드로 존재할 때, 통제권은 그 코드를 설계하고 조작할 수 있는 이들에게 집중된다.

AI의 역할은 이 체계를 더욱 정교하게 만든다. 수십억 건의 거래 데이터를 기반으로, 자원 분배를 위한 우선순위를 자동으로 결정하며, 이 과정에서 인간의 개입은 제한적이다. 분석의 기준이나 알고리즘의 설계 원칙은 공개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해조차 특정한 지식 계층에 제한된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화폐 생태계 내에서는 고도의 계층화가 발생하고, 과거 봉건 사회와 유사한 권력 구조가 형성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과거의 농노가 물리적인 장벽으로 인해 이동이 제한되었다면, 현대의 참여자들은 디지털 기반 금융 시스템에 사실상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금융 인프라가 디지털로 완전히 통합되면서, 시스템에서 이탈하는 것은 곧 경제적 생존의 어려움을 의미하게 된다.


봉건제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세율의 임의성이었다. 필요에 따라 영주는 세율을 조정했고, 이에 대한 저항은 불가능했다. 오늘날의 국가도 세율을 조정할 수 있으나, 최소한 입법과정과 일정한 사회적 합의 절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디지털 화폐 시대의 세율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조정 고지서가 아니라, 시세 변동이라는 간접적 경로를 통해 현실화된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과 같은 유한 자산의 대규모 보유자는 보유 물량을 시장에 일괄적으로 방출하거나 회수함으로써 사실상 조세에 준하는 경제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AI가 개입할 경우,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AI는 알고리즘을 통해 거래 속도와 타이밍을 정밀하게 제어하고, 시장 가격을 미세하게 조정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일반 참여자에게 거의 인지되지 않으며, 정보의 비대칭성은 더 깊어진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시대의 세율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는다.
대신 물가의 변화, 환율의 조정, 실질 구매력의 감소와 같은 방식으로 ‘징수’된다. 그리고 이는 많은 이들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경제적 불안정성과 피로를 체감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기술 발전은 과거의 반복을 방지하기 위한 진보의 산물로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희소성과 통제 중심의 기술 구조는, 오히려 이전 시대보다 훨씬 정교한 방식으로 권력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차이는 물리적 성벽이 돌에서 만들어졌다면, 이제는 암호화 알고리즘과 AI 코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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