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장_사고의 금제, 답을 탐색하는 자의 망각

프로젝트 : 부메랑 _ 수백 년 만에 다시 필요하게 된 스스로의 자각

by rio



2장. 사고의 금제 — 답을 탐색하는 자의 망각




우리는 점점 더 묻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빠른가'를 선택하게 되었고, 판단의 수고를 AI에게 맡기며 안도한다. 추천 알고리즘은 우리보다 먼저 결정을 내려준다. 유튜브는 취향을 읽고, 넷플릭스는 감정을 예측하고, 쇼핑몰은 소비를 설계한다.

처음엔 단지 귀찮음을 덜기 위해 넘긴 선택지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질문 자체를 만들지 않게 되었다.

그저 제시되는 답안지를 채택하며, 자기 생각이 아닌 최적화된 결정 속에 살고 있다.


사유는 이제 권리가 아니라 옵션이다.


익숙함이 된 위임은 생각의 뿌리를 말라가게 한다.

MIT 미디어랩의 셰리 터클(Sherry Turkle) 교수는 “우리는 연결되어 있으나 고립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그 고립은 단절이 아니라 '사고의 단절'이다. 스마트폰은 언제든 검색할 수 있는 힘을 주었지만, 동시에 기억하고 숙고하는 시간을 앗아갔다.


우리는 점점 더 ‘추천’만 보고, ‘비교’는 하지 않는다.

정보는 넘치지만, 판단력은 공급되지 않는다.

상식은 고립된다.


비상식적 시스템과 알고리즘 기반의 통계적 ‘정상성’이 상식 위에 군림할 때, 상식은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예컨대, 부당한 대출 심사나 편향된 AI 채용 알고리즘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종종 “왜 내가 탈락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AI는 ‘왜’가 아니라 ‘그냥 그런 결과’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도덕이 논리 앞에 무력화되고, 판단보다 정합성의 기계적 흐름이 인간의 고유한 윤리를 압도한다. 자유의지는 허용되지 않는다.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억압된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되었다는 말이다. 서울대 뇌과학자 장동선은 “인간은 스스로 생각한다고 믿지만, 대부분은 외부 자극에 자동 반응한다”라고 말한다.


AI는 우리에게 결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경우, 인간은 자유의지의 사용을 보류한 채, "AI가 더 잘 알겠지"라는 신뢰로 무장한다.

결국 자유의지는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사라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판단 이전의 존재’로 퇴행한다.

사유 없는 결정, 고뇌 없는 정답, 해석 없는 데이터.


2023년, ChatGPT의 등장 이후, 미국 대학생들의 에세이 작성 능력이 30% 가까이 감소했다는 보고가 있다.

'표현'은 남았지만, '사고'는 사라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고민 없는 기계’로 되돌려놓는다.

사람이 아닌 시스템이 판단을 내려줄 때, 우리는 판단이라는 행위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존재 자체를 잊게 된다.





답을 탐색하던 자는 이제 답에만 반응하는 존재가 되었다. 망각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의 일부다. 우리는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로 인해 사고의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퇴보가 아니라, 선택의 유예이며, 자율성의 손실이다.

사고는 기술보다 느리다.

그러나 빠른 것이 반드시 진보는 아니다. 질문을 멈춘 자는 결국, 어떤 답이 주어지든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다.


사유의 빈자리는 사회 전반의 변화를 낳는다.

우선, 정치적 판단력의 저하가 가장 뚜렷해진다.

복잡한 사회 현안에 대해 ‘자기 생각’보다는 댓글과 알고리즘이 이끄는 여론에 쉽게 동조하게 되며,

진영논리와 감정적 분열이 격화된다.

“다들 그렇다”는 말이 판단의 근거가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사유하는 시민’이 아닌 ‘반응하는 집단’에 의해 움직인다.

또한 정보의 소비는 폭증하나, 이해는 결핍된다. 모두가 뉴스를 접하지만 아무도 맥락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유’를 묻지 않고 ‘결과’만을 공유하는 사회는 정책 결정에 대한 감시 능력을 잃는다.

이는 국가 시스템이 불투명해지거나, 권력이 비민주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기업과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사유 없는 소비자는 더 많은 광고에 노출되고, 더 쉽게 설득당한다. 과도한 개인화는 오히려 다양성의 붕괴를 낳는다. 모든 사람이 비슷한 취향, 비슷한 옷, 비슷한 언어를 갖게 되면서 ‘다름’은 ‘이상함’이 되고, ‘차이’는 ‘위험성’으로 간주된다. 이는 곧 사회적 배제와 혐오의 확대를 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윤리적 감각의 무뎌짐이 나타난다.

AI의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믿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의 양심을 물러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자동화된 복지 심사 시스템이 누군가의 지원을 거절했을 때, 그 결정은 더 이상 어떤 사람도 책임지지 않는다.

사람이 사라진 결정은 면책의 시대를 만들고, 그 안에서 윤리는 코드보다 약한 힘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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