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유방암이 어린 자녀에겐 불안감으로….

by 김인경


평범한 일상의 틈을 비집고 찾아온 유방암이란 병마는 우리 가족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초등학생 1학년 4학년 어린아이 둘을 두고 말없이 병원에 온 나는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아르바이트생을 구하지 못한 남편은 여전히 키즈카페에 얽매여 있었다. 교회 동생이 매일 아침 하루 반찬을 해주긴 했어도, 어린 두 아이가 챙겨 먹는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었다.

저녁마다 딸은 전화해 오늘은 접시를 깼다는 둥 소소한 사건들을 말하면서 당황해하는 모습이 나를 더욱 애타게 했다. 아들딸에게는 깨진 그릇을 치우지 말고 피해 있으라고 했지만, 한참 어리광을 부려야 할 나이에 엄마의 부재로 둘이 모든 걸 해결하고 있었다.




한방병원에 온 지 2주가 되어 퇴원하려고 하는데 의문의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수술 후 생긴 두통은 잠시 멈춘 듯하다 불현듯 나타나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의사 선생님은 퇴원을 미루자고 했지만, 아이들도 걱정이었고, 원인도 알 수 없는 두통으로 계속 입원한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아 퇴원했다. 집에 도착해 아이들을 만나자, 딸은 웃으면서 반겼지만, 아들은 어두운 얼굴로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없던 아들은 학교만 다녀오면 나만 찾았다. 내가 계속 몸이 안 좋은 기색을 보이자, 어린 아들은 내 눈치만 살폈다. 며칠 지나, 나는 평상시처럼 “아들아, 일어나야지! 학교 갈 시간이야.”라며 아들을 깨웠지만, 아들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상했다. 아들에게 다가가 얼굴을 만지자, 내 손이 따끈했다.


아들 몸은 열로 화끈화끈 달아올라 얼굴이 벌게져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흔들어 깨우자, 아들은 초점 없는 눈으로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아들! 왜 이래? 어디 아파?”라고 묻자, 아들은 나만 보고 가만히 있었다. 남편을 불러 동네 응급실로 갔다. 링거를 맞추고 입원시켰다. 그 당시 두통이 심한 나는 아들을 간병할 정도의 체력이 되지 않아 둘이 함께 입원했다.


우리는 2인실을 요청했다. 아들과 둘이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아들은 점점 편안감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열이 떨어지지 않자, 독감 검사를 했다. ‘신종독감’에 아들이 걸렸다며 격리를 위해 병실을 옮기라고 했다.


아들 얼굴에 불안감이 맴돌았다. 나는 그냥 있겠다고 했다. 병원 측에서는 그러면 입원비도 비싸고 옮아도 책임지지 않겠다며 난처해했다.


“선생님! 아들이 병실을 옮겨도 제가 간호해야 하는데 1인실로 가나요?”


“아니요. 다른 독감 환자들과 함께 있는 병실로 가요.”


“그러면, 저한테는 더 위험하지요. 그냥 여기 있을게요.”라고 거절하자, 병원 측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말이 없는 아들은 엄마와 둘이 있을 수 있다는 소리에 TV를 보며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딸은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가지 않고 병원으로 왔다. 세 명이 함께 있자, 아이들도 다시 예전처럼 편해 보였다. 저녁에 아빠가 딸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일주일이 지나자, 아들 감기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아들 몸이 좋아져 퇴원해 집으로 왔지만, 나의 수술 후유증은 여전히 심했다. 밤에 아들은 다시 열로 몸이 뜨거웠다.


말이 없는 아들은 나를 애처롭게 보며 “엄마! 우리 다시 청구 병원 2인실 가서 입원하면 안 돼?”라며 울먹이는 아들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들은 집에 오면서 불안했던 거다. 내가 지난번처럼 학교 간 사이에 병원에 갈까, 봐!

마음이 아팠다. 내 생각만 했던 내가 미웠다.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술밖에 안 했는데, 집에 와서 정상적인 생활이 되지 않았다. 자꾸 정신을 잃으면서 춥고 기운이 없었다.

온몸의 모든 뼈 마다가 시리고 저린 듯한 통증과 의자나 소파에만 앉아도 허벅지랑 엉덩이의 차가움이 전신으로 퍼졌다. 거실 바닥이 따뜻한데도 맨발로 바닥을 걸을 수가 없었다. 산후풍보다 더 심한 증상이었다.


병원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통증과 어지러움을 치료하지 못했다. 힘들어하는 엄마 모습을 본 아들은 엄마가 자신이 학교 간 사이 사라질 거라는 두려움에 저녁이 되자, 다시 아픈 것이었다.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아이의 불안감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다음날도 학교는 보내지 않았다.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아이의 불안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다음 날 학교에 다녀오라는 내 말에 아이는 문 앞에서 나가질 않았다. 약속했다. 집에 있겠다고. 약속은 꼭 지키는 거라고 알고 있는 아들은 안심하고 학교에 갔다.


불안한 나는 아들을 마중 나갔다. 아들은 나를 보며 말없이 달려왔다.


내 멋쟁이 아들!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이 오랜만에 왔다고 잘해주었어?”라고 묻자, 아들은 내 질문에는 관심 없다는 듯


“엄마. 내가 엄마 하라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말 잘 들을게. 병원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라며 하루 종일 생각한 말을 조용조용히 했다.


“아들아!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그래! 엄마가 죽는 것보단 병원 다녀오는 게 낫지 않아?”라고 말하자,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냥 내 옆에서 죽어. 그럼 내가 다시 살려줄게.”라며 게임에서 주인공이 살아나듯 다시 살리면 된다는 식으로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이 정도로 힘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없었다. 곧 아이들 봄 방학이었다. 저번에 갔던 병원에 연락해 봤다. 아이들도 함께 입원할 수 있는지를.


딸도 불안했는지 언제부턴가 기침을 끝도 없이 해댔다. 워낙에 약하게 태어난 아들은 독감 후유증과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함께 병원에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아들은 무조건 간다고 했다. 딸도 자기만 놓고 가지 말라며 꼭 데리고 가 달라고 했다.




나는 봄 방학까지 기다렸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강동 K 병원으로 향했다. 작은 3인실의 병실은 우리 가족의 또 다른 집이 되었다. 불안한 아이들은 엄마와 있으면서 점점 안정을 찾아갔고, 엄마의 힘든 모습에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설날에 태어난 아들은 9살의 생일을 병실에서 엄마와 누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을 만끽했다. 어린아이에게 부모의 사랑은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전부였다.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한 2주간의 병원 생활에서 불안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법을 배웠다. 엄마가 병원에 가도 사라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어린 남매는 서로의 소중함과 가족의 사랑을 배웠다. 나 또한 어린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빠른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11년째 암 환자로 투병 중이다.


이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나의 병이 내 귀한 자녀들에게 무서운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지금도 나는 최대한 아이들 앞에서 아픈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부재보다 더 무서운 건 아이들이 내 고통을 보면서 죄책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가 싸우거나 아프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죄의식에 빠진다. 어릴 때 가진 죄의식은 어른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모르는 상처를 내 자녀들이 가지고 살지는 않을까?’ 늘 걱정된다.


20240206


#유방암 #가족 #불안감 #어린 자녀 #입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선택 : 항암&방사선 치료 거부 후의 생생한 경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