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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경 Feb 15. 2024

함께하지만 혼자인 명절: 가족 간의 미묘한 갈등

 

2024년 새해가 밝았다. 한국 고유의 명절, 설날이다. 유난히 따뜻한 날씨가 마음을 포근하게 해줄 것만 같았지만, 현실은 나에게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남편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들을 억지로 깨워서 큰집으로 향했다.


해마다 구정 명절이면 나에게 찾아오는 불면의 밤. 오늘도 역시나 슬픔에 잠겨 붓고 까칠한 얼굴로 새해를 맞이했다. 나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남편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로 인한 심리적 고통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결혼 이후 유방암이라는 거대한 시련이 찾아오기 전까지, 평화로운 날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의 상식과 맞지 않는 시댁과의 갈등, 남편과의 불화 등 끊임없는 사건 사고는 나를 지치게 했다.     




지금은 나와 남편을 이간질한 시누이도 세상을 떠나, 시댁 식구라고는 큰형밖에 안 계신다.  한 명 남은 큰형님 조차도 내 가치관 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이 나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이해하며 잘 지내기보단 부딪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시댁의 변화가 있었음에도 그 아픔은 쉽사리 치유되지 않았다. 명절이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나는 가족 간의 틈은,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아들과 큰집에 가는 남편에게 나는 아직 병원에 있어서 못 왔다고 말하라고 했지만,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집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남편과 사는 이상 남편 체면은 세워주고 싶어 아이들을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가족 간의 갈등 속에서 나만의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가면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따라온다. 이유는 하나이다. 상대가 내 자식들을 무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챙긴다. 큰집 분위기가 오면 반기기도 않으면서, 안 오면 뒤에서 뭐라고 한다.   

  

결혼하고 아무리 싫어도 내가 선택한 남편이 원하기에 명절마다의 태안행은 의무처럼 내려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큰형님 댁으로 갔다. 시누이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작은 시아주버니가 자살한 이후에도 갔었다.     


과거의 상처들, 시댁과의 불편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편을 위해 명절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갔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내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남편과 큰형 둘만 남았기에 갈 때마다 눈치가 보였지만, 남편을 위해 전날 저녁에 갔었다.     


작은 아주버니께서 자살한 후, 첫 추석 명절이었다. 나는 형님에게 “아주버니 돌아가시고 유산은 얼마나 돼요? 남은 3식구가 살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큰아들도 대학 가야 하고, 작은딸도 이제 중학생인데 작은형님도 살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보험금 5000에 통장 있는 돈하고 차 팔아서 1억 5천쯤 될걸?”이라고 말하는 큰형님은 불만 가득 찬 목소리였다. 큰형님과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작은형님은 아파트도 팔고 이사 가서 명절인데 아이들도 보내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했다.     


아파트값이 15천 정도라고 했지요? 그러면 3억인데 세 명에 3억이라? 많지는 않네요. 살 집도 구해야 하고?”라며 나는 안타깝게 말했다. 갑자기 웃긴다는 듯이      


“허. 남들은 3억 빚도 남겨주는데, 그 정도면 많지?”라며 큰소리로 흥분하며 화를 냈다. 황당한 나는


“형님!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보세요? 같은 여자로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지요?”라며 말대꾸하자, 갑자기 큰소리로     


“집안 큰 행사에는 오지도 않고 매번 우리만 가고,”라며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나에게 계속 불만을 토했다.     


“형님! 우리가 갈 형편이 안 됐잖아요? 아이들도 어린데 봐주는 사람도 없고. 학원도 그렇고. 그래도 부조는 꼬박꼬박 했잖아요. 솔직히 저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시댁 친척들도 잘 몰라요. 꼭 가야 하면 저희 남편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라고 말하자, 귀찮다는 듯이 창고 방을 가리키며,     


오늘 저 방에서 동서 식구들 자.”라고 말했다. 성질 더러운 나는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저 방에 잘 공간이 어디 있어요? 형님 아들 한 명도 다리 뻗고 잘 수 없는 좁은 방에 우리 4식구 보러 자라고요? 정말 기가 막혀서.”라고 말하자, 방에서 남편과 큰 아주버니가 나오셨다.     


형님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고 남편은 인상 쓰며 나에게 또 왜 또 그러냐?”라는 식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억지로 온 나는 “내가 왜 여기 와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우리가 거지야?”라며 큰소리치자, 큰아주버니는 미안해 어쩔 줄 모르고 남편은 나에게 화내며 “그냥 예전처럼 마루에서 자면 되잖아!”라며 말리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이 많았었다. 큰집에 도착하면 큰집 아들들은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형님도 부엌에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주버니만 “오셨어요?”라며 인상 쓰면서 의례적인 인사뿐이었다. 올 때마다 그런 분위기도 싫었다. 반겨주지 않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공무원 시험 본다고 미국 오기 전 학원 할 때까지 누나와 큰 아주버니가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했다. 거기다 효자인 큰아주버니는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까지 부모님만 챙겼을 것이다. 게다가 미친 시누이의 간섭을 몇십 년 받았으니 시댁 식구들이 예뻐 보이지 않다는 건 이해 한다.     


하지만, 나와 내 자식들에게 함부로 하는 건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큰집의 찬밥 신세, 그곳에서 불편함은 나의 마음을 더욱 각박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아침에 가서 제사만 지내고 아침 식사 후, 치우고 바로 왔다. 반찬도 우리 입맛에 맞지 않았다. 아니 음식을 못해도 너무 못한다. 명절에 왜 미역국을 끓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냄비에 끓여도 남았다.     


한번은 미역국에 간을 가려고 하자, 못하게 했다. 미역국에 간을 하면 안 된다나? 고기 또한 언제 사 온 건지도 모르는 얼린 양념 된 소불고기를 꺼내서 익혀주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론 나는 내 자식들 먹일 LA갈비를 직접 만들어 갔다.

     



남편이 트럭 일 한다고 했을 때 나도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내 생각엔 나 때문에 잘난 동생이 험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4번째 유방암이 왔다. 큰집 누구도 연락 한번 없었다. 그 뒤로 몸이 안 좋아 명절엔 거의 병원에 있기도 했지만, 집에 있어도 오늘처럼 가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별일 없으면 보내려고 노력했다. 3일 전 저녁 식사 도중 딸이

엄마! 우리 꼭 큰집 가야 해?”라며 싫다는 표현을 했다.

“당연하지! 왜? 가기 싫어?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묻자,     


가면 우리 정말 할 게 없어. 그리고 그 집 식구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눈치 보여서 가기 싫어. 우린 매일 구석에 따로 있어. 그리고 아침도 꼭 먹고 와야 해?”라며 불평을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거 같았다.     


“아빠는? 그런 분위기에서 가만히 있어?”

“알잖아?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있는 거?”라는 딸 말에 아들은


“그래도 세뱃돈 주잖아. 그거 받으러 간다고 생각해.”라며 긍정적으로 말하며 우리를 웃겼다.     


나는 화가 났다. 짐작은 했지만, 내 자식이 느낄 정도로 그런 대우를 받는 데 가만히 있었다는 게 화가 났다.     



가족은 혈연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로 이해하고, 아끼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가 진정한 가족의 의미다. 짜증이 났다.     


“아빠에게 말해보지? 가기 싫다고.”

“말했더니 엄마가 또 뭐라고 했냐며 안된다는 거야.

“내가 제일 만만하구나! 너희가 바보니? 왜 내 탓을 하니?”     


남편은 내가 항상 아이들을 조정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남편이 나는 답답하다. 자신은 최선을 다하지만, 그 최선이 우리에겐 최고로 느껴지지 않는다. 최고와 최선의 차이를 모른다.      




“엄마가 같이 갈까? 그럼 그렇게 못해! 예전에 한 번 미친 짓 해놔서 나가면 함부로는 안 해.”라며 골방 사건을 이야기 해주자, 딸은


“아니야. 그냥 집에 있어. 엄마 힘든 데 가지 마!”     


미안했다. 지금 내가 가봐야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겉보기에 멀쩡한 내가 힘들다고 해도 눈엣가시인 내가 이쁘게 보이겠는가? 그렇다고 큰 집 가서 힘든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다.      




딸이 감기가 어제저녁부터 갑자기 심해졌다. 딸은 그 핑계 대고 가지 않겠다고 했다. 화가 났지만, 말이 없는 아들은 나에게


세뱃돈 받아서 누나 안 줄 거야.”라며 자신도 가기 싫지만, 억지로 가서 받아온 누나 세뱃돈을 챙겨주지 않겠다며 단호하게 말했다.     


“알아서 해. 엄마는 뭐라 못해. 둘이 해결해.”라고 말했다.    

  



딸과 아들이 털어놓은 그들의 마음속 이야기는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명절이라는 시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가족이라는 존재가 각자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오는지를.      


이제 나는 가족 간의 갈등과 스트레스를 넘어, 우리만의 행복을 찾아가고자 한다. 우리 가족만의 새로운 명절 전통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나와 우리 가족에게 주어진 소중한 선물이다.      


명절의 아침이 밝아오며, 나는 새로운 희망을 품는다. 우리 가족이 서로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아끼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든 순간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우리만의 명절이 될 것이다.


20240210


#명절 #가족 #가치관 #시댁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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