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감정으로 우리 삶에 의미를 더해주고 행복과 위로를 제공해준다. 사랑으로 연결된 만남은 새로운 가정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사랑은 "유사성의 원리"처럼 서로 닮은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상호보완"이라는 이유로 나와 다른 면모를 지닌 이성과 사랑하고 결혼하기도 한다.
"상호보완"을 위해 결혼한 부부가 자녀를 낳았을 때, 부모는 본인과 다른 면을 가진 자식에게 애정을 더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일반적으로 아들은 아빠를 닮고, 딸은 엄마를 닮은 경우가 많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아들은 커가면서 더욱 아빠를 닮았다. 뒷모습을 보면 걷는 모습이나 다리 모양까지 똑같다. 딸 또한 나와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체구나 체형 얼굴 모양 등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같이 운동을 다니면 아시는 분들이 가끔씩 딸을 나와 착각하고 인사도 해주신다.
나는 딸과 아들을 키우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그 시간들을 뒤돌아보면, 딸보다는 아들을 유독 사랑스럽게 대했던 것 같다. 딸과 아들이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아들을 껴안고 뽀뽀하며 뒹굴고 있었다. 식당을 가도 아들은 항상 내 옆에 앉으려고 했다. 가끔 딸이,
“나도 엄마 옆에 앉고 싶어. 아빠 옆으로 가." 하면,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나 옆에 서 있기만 하다. 어쩔 수 없이 딸은 화를 내며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반면에 남편은 아들보다는 딸에게 모든 애착을 주었다. 학원 끝나고 늦게 집에 돌아온 아빠는 딸과 밤늦게까지 동영상을 찍으며 놀아주었다. 한번은 새벽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난 나는 남편의 딸에 대한 애착에 놀란 적이 있다. 남편은 열심히 동영상을 찍고, 딸은 어린이집에서 배운 노래와 춤을 추며 좋아하고 있었다. 갑자기 딸이 ”응아“라는 말 한마디에 남편은 아이가 불편할까 놀라서 변기를 재빨리 가져다주었다. 딸이 힘들게 힘주는 모습이 안타까워 옆에서 같이 힘을 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받아보지 못한 아빠의 사랑이였다.
딸이 6~7살 때쯤, 나는 TV 드라마를 보고, 딸과 아들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아빠가 들어와 TV 보는 나를 못마땅하게 보며 딸 옆에 서 있었다.
차화연이 엄마로 아들을 너무 귀하게 키우는 드라마였다. 차화연 아들이 "우리 엄마는 아들 바보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갑자기 딸이,
"우리 집도 아들 바보 있는데…."라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누군데?"하고 물었다.
"엄마!"라고 딸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고 그리던 그림을 그렸다.
나는 뒤통수를 망치로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럼! 우리 딸은?" 나는 다시 딸에게 물었다.
"여기 있네. 딸바보!" 하며 손가락으로 아빠를 가리키면서 말하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깊은 반성과 함께 자녀들에 대한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던 걸까?
어린 딸에게 얼마나 상처를 준 것인가?
내가 엄마로서 충분히 책임을 다한 것일까?'
가슴이 저려오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이후로, 나는 자녀들과 함께 할 때, 음식 먹을 때, 안아줄 때 등 모든 행동에 있어서 아들보다 딸을 먼저 생각했다. 딸의 원하는 욕구에 우선 관심을 두었고 딸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 아들에게도 엄마가 없으면 누나가 우선이고, 누나는 너보다 항상 위라는 걸 심어주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손가락마다 유난히 아픈 손가락이 있다. ‘나를 닮은 딸을 남편이 더 사랑한다고 느끼면서 시샘을 한 건 아닐까? 나 또한 남편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남편 닮은 아들에게 원한 건 아닐까?' 등 많은 생각이 오갔다.
깊은 반성과 변화를 통해 자녀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날이었다. 자식이 많은 것도 아닌데 사랑 조절을 못 하는 엄마가 창피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딸에게 감사했다. 항상 딸밖에 모르는 남편이 미웠는데 그날만은 정말 고마웠다. 이제는 항상 딸과 아들을 평등하게 사랑하며, 가족과 함께 보내는 소중한 시간을 더욱 귀히 여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