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경희대 정보디스플레이학과에 입학한 딸은 자신의 1년을 포기했다. 나는 아까웠다. 우리는 서울에서 변두리인 은평구에 산다. 이 동네에서 경희대 정보 디스플레이학과에 합격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딸이 고등학교 때 성적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아들이 고등학교 1학년 첫 상담에서 담임 선생님이 누나가 어느 대학 무슨 과에 다니느냐고 물었을 때, 경희대 디스플레이학과에 다닌다고 했단다. 그때 담임은 ”너희 누나 선일에서 전교 1등 했니?”라고 물을 정도로 이 동네에서는 가기 힘든 대학이다.
두 달 정도 학교에 다니면서 스스로 포기했다. 집에서 가깝고 더 좋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의 '포기'란,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두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긍정적인 의미의 '포기'란,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하던 일을 그만두는 경우이다.
반수를 결심한 딸도 지금의 학교보다 교통이 좀 더 편하고 인지도가 좀 더 높은 학교에 가기 위해 포기한 것이다. 나는 딸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내가 살면서 포기한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 대학원 졸업 논문을 포기했다. 대학원을 남들보다 늦게 들어간 나는 부족한 영어 공부를 위해 미국에 갔었다. 외로운 유학 시절에 남편을 만났다. 서로의 나이가 적지 않아 결혼을 서둘러야 하는 나이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한 뒤, 바로 임신이 되었다. 논문을 써야 하는 나에게 임신은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난 아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대학원은 수료로 끝났다. 다시 논문을 쓰고 싶었지만, 우린 경제적 문제로 학원을 운영하기로 했다. 결국, 대학원 졸업과 딸 중에 내 귀한 딸을 선택했다.
두 번째, 새로운 일을 포기했다. 학원을 그만두고 키즈카페를 운영할 때, 나에게 유방암이란 큰 손님이 찾아왔다. 그때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딸도 불안했겠지만, 아들이 엄마와의 분리불안을 심하게 느꼈다. 내성적인 아이가 더 내성적으로 되면서 신종플루라는 병으로 자신의 불안감을 표현했다.
나는 아들과 2인실에서 일주일간 입원했다. 엄마 옆에서 치료받은 아들이 어느 정도 건강해져서 퇴원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는 아들을 집 근처에서 만났다. 말이 없는 내성적인 아들이 갑자기 ”엄마! 내가 엄마가 하라는 거 다 할게. 공부하라면 공부하고 뭐든 다할게. 병원에 만 가지 마!”라고 간절하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너무 힘들도 아파서 그래. 그러다 엄마 죽으면 어떻게 할래?”라고 심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아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럼 내 옆에서 죽어. 병원 가지 말고. 내가 다시 살려줄게.”라고 말했다.
게임에서 죽은 주인공이 다시 살아나듯 죽음의 두려움보다 엄마의 부재가 더 힘들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남편에게 키즈카페를 정리하고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세 번째, 10년간의 내 인생이다. 10년간의 투병 생활은 내 모든 인생을 빼앗아 갔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4번의 유방암 재발은 내 인생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인생을 포기하지 않으면 건강을 찾을 수 없었다. 스터디 카페를 열심히 준비했지만, 남편 혼자는 역부족이었다. 다도학원도 준비했지만, 코로나 환경과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10년간의 인생을 살아있다는 생명과 바꾼 것이다.
우리 인생을 살면서 ‘포기’는 피할 수 없는 경험 중 하나일 것이다. 절실했던 일을 어쩔 수 없이 포기했어야만 했을 때는 후회와 자책, 자아 존중감의 감소, 시간과 노력의 손실 등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것'이 세상 이치라고 배웠다. 지금보다 더 큰 가치와 의미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개인의 경험에 따라 포기의 양면성을 깨닫고 세상 이치에 따르면 된다. 이때, 새로운 시작과 배움이 될 수 있도록 '유연한 사고와 긍정적인 마인드 셋'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