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가족사진 12화

그만큼 지나간, 그리고 지나갈 그 시간(2)

by 김종열

염색을 해야 할 날이, 발가락의 티눈을 참을 수 없는 날이, 얼굴의 잡티가 눈에 거슬리는 날이, 이마의 주름이 깊어 보이는 날이, 이가 상해 치과를 찾는 날이 오면 늙음을 남기고 떠난,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젊은 날의 시간은 젊은 시간이고 늙은 날의 시간은 늙은 시간일까? 아닐 테지. 젊음과 함께하는 시간이 있고 늙음과 함께하는 시간이 있는 거겠지. 시간이 스쳐 지나면서 젊음을 야금야금 앗아가는 거겠지.


목욕탕이 휴일이면, 화분에 물을 주는 날이면, 애들이 오기로 한 날이면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하루도 빠지고 싶지 않은 목욕탕의 휴일은 누군가에게 휴일을 주는 좋은 일인가? 아니면 오늘 하루 갈 수 없어서 기분 나쁜 일인가? 화분에 주는 물에는 사랑이 담겨있는가? 아니면 그냥 숙제처럼 하는 일인가? 애들은 오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오는 건가? 아니면 의무감인 건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겠지. 문제는 모든 일을 선과 악으로, 진심과 거짓으로, 옳음과 그름으로, 좋음과 나쁨으로, 그렇게 나누려고 한다는 거. 또 쓸데없는 생각인가? 어떤 시간은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평온한 일상이 너무 평온해서 그렇게.


편한 이들과 저녁 식사하기로 약속한 날이 오면, 이런저런 곗날이 다가오면, 운동동호회의 월례회 날이 오면, 무슨 무슨 위원회에 참석할 날이 오면 또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이런 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씩 줄어들겠지. 시간이라는 녀석은 사회적 관계와 기능이라는 걸 하나씩 뺏어가니까. 소용됨이 줄어들수록 상실감은 커질 텐데. 어쩌나?

긴 호흡으로 시간을 인지할 때가 있다. 여행 가기로 한 날이 되면, 생일날이 되면, 무슨 무슨 기념일이 되면, 돌아가신 분들의 기일이 되면, 명절날이 되면,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벌써? 하면서.

이런 날에는 꼭 이런 마음이 든다. 다음에 여길 또 올 수 있을까? 이런 날을 몇 번 더 맞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마음. 다가올 시간을 의심하는 건 남은 시간이 적다는 거지. 어렸을 땐, 젊었을 땐 한 번도 그런 마음 든 적 없었으니.


짧은 순간의 시간을 인지할 때도 있다. 전동 걸레 청소기의 움직임이 둔해지면, 안마기 작동이 끝나면, 듣고 있던 음악이 끝나면, 모바일 게임이 한 단계 넘어가면,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는 건 그만큼 집중했다는 거, 열심히 했다는 거, 좋았다는 거, 즐거웠다는 거겠지. 시간이 지겨운 사람보다는 가는 줄 모르는 시간을 많이 보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겠지. 시간을 잡으려는 사람보단 잘 보내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일 테고.


어제 왔던 산책길을 오늘도 걸으면, 인공눈물 하나를 사용하면, 저녁 식탁에 앉으면, 발길이 침대로 향하면 하루라는 이름의 시간이 흐른 거다.

그렇게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한 해가 바뀌고, 또 흐르고, 또 바뀌고…


새로 읽을 책을 펴면 지나갈 시간이 펼쳐지는 거다. 지나갈 시간이 검은 글자들 위에 점점이 박혀있다. 그만큼 지나간 시간이 아닌, 지나갈 그 시간이.


미로-성스런 여왕.jpg 미로-성스런 여왕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