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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열 Nov 24. 2024

그만큼 지나간, 그리고 지나갈 그 시간(1)

 읽던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주르륵 책장을 넘겨본다. 지나간 시간이 검은 글자들 위에 점점이 박혀있는 듯하다. 눈길이 글자에 닿을 때 시간도 글자를 스치며 지나갔겠지. 첫 장을 대할 때와 마지막 장을 대할 때의 마음이 똑같았을까? 한 권의 책이 한 권만큼의 뭔가를 남겼을까?


 노트의 써진 페이지가 써지지 않은 페이지보다 더 많아지면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써진 페이지는 지나간 시간이고, 지금 쓰고 있는 페이지는 지나고 있는 페이지고, 아직 남은 페이지는 지나갈 시간이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글자들이 몇 권이나 되었을까? 앞으로 몇 권 더 쓰게 될까?   

  

 노트북을 켠다. 이것저것 끄적여놓은 파일을 모아둔 폴더를 열어본다. 제법 쌓여있다. 수필이나 시, 그때그때 드는 생각들의 파일. 시간이 떠나며 남긴 것들이다.

 지나갈 시간에도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까? 그럴 테지. 지금처럼 뭔가를 끄적일 테지.     


 푸른빛이 바래고 시들고 말라서 낙엽이 되어 떨어지면, 옷장에 두꺼운 옷이 걸려서 비좁아지면, 김장 김치를 또 담그면, 만나던 사람 중 누군가가 보이지 않으면, 제법 긴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언제 흘러가 버렸을까? 시간의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는 건 늙은 머리의 기억력 감퇴 때문이란다. 늙어서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건지, 빠른 시간이 늙게 만드는 건지.     


 쌀 냉장고가 바닥을 보이면, 한 알씩 꺼내먹는 사과가 떨어지면, 커피 원두 봉지가 가벼워지면,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시간 속에 사라진 쌀은 오붓한 식사 시간을 주었을까? 피와 살이 되었을까? 아침 사과는 과연 금처럼 귀하게 몸으로 스몄을까? 커피 한 잔은 달콤한 빵과 함께 녹아들며 행복한 시간을 주었을까? 사색의 시간이 되었을까?     


 시간이 지나면 줄어들고 비워지고 떨어지는 것들이 있다. 책상에 둔 화병의 물이 줄어들면, 온수보일러의 물이 부족하다고 경보음이 울리면, 약병(이건 언제 이렇게 늘었을꼬?)이 비면, 화장실의 두루마리 휴지가 떨어지면, 자동차가 주유소를 찾으면, 그만큼의 시간이 줄어들고 비워졌다는 거다.

 사용한 만큼 줄고, 비고, 떨어졌겠지. 사용해 버린 시간과 함께.   

  

 시간이 지나면 쌓이고 채워지는 것도 있다. 책장의 먼지가 슬금슬금 쌓이면, 청소기의 먼지 통이나 쓰레기통이 가득 차면, 더러워진 옷이 빨래통을 채우면, 그만큼 시간의 찌꺼기가 쌓였다는 거다.

 찌꺼기만 쌓였을까? 아니겠지. 누군가와의 관계도 쌓였을 테고 그 관계가 주는 고마움도 쌓였을 테고, 가끔은 원망도 쌓였겠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도 쌓였을 테고, 가슴에 너그러움도 쌓였을 테지. 아니지 어쩌면 옹졸함이 쌓였을 수도…     


 관리비 고지서가, 도시가스료 고지서가, 상 하수도료 고지서가, 신문 구독료 고지서가 도착하면, 주문한 택배가 도착하면 그만큼의 시간이 떠났다는 거다. 

 택배 물품은 이미 대금을 지급한 필요함이 도착한 것이고, 공과금 고지서는 이미 사용한 필요함에 대한 외상값이다. 산다는 건 필요함의 연속이고 그 필요함은 항상 대가를 요구한다. 고지서에 적인 금액은 필요함에 대한 대가인가? 살아온 시간에 대한 대가인가?    

 

 머리카락이 덥수룩해지면, 손톱과 발톱을 자를 때가 되면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거다.

 잘라낸 손발톱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잘린 길이만큼 내 삶의 잔여 시간이 줄어들었겠지. 아니 어쩌면 손톱 자란 길이만큼 슬기로움이 자랐을 수도… 그럴까? 교활함이 자랐을 수도 있는데? 슬기로움을 키우는 사람도 있고 교활함을 키우는 사람도 있겠지. 중요한 건 어느 쪽에 속하는 사람이 되는가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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