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 운동인지, 산책인지, 아니면 누굴 만나기 위함인지는 생략하자. 하고 싶은 말은 왼쪽 발바닥이 살짝 불편하다는 것이니.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발을 살펴본다. 다른 살갗에 비해 두터워서 둔감해 보이는 발바닥에 보일 듯 말 듯 한 가시가 보인다. 손톱깎이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가시를 집어낸다. 애걔! 겨우 이것 때문에 그렇게 걷기가 불편했나? 이렇게 작은 이물질 하나에 몸이 그렇게 반응했나? 싶다.
언제였었나? 한쪽 어깨가 살짝 불편할 때가 있었다. 평상시엔 아무렇지도 않은데 움직일 때 경미하게 아픈. 그때도 몸은 귀신같이 아픈 것에 반응했다. 불편한 쪽을 쓰지 않거나 힘주지 않는 것으로. 좋지 않은 부위를 보호하려는 본능 같은 건가? 어쨌건 작은 불편함을 몸은 정말 잘 기억하는 것 같다. 그런데 타인의 아픔은, 타인의 불편함도 잘 기억하고 이해할까? 놉! 불행히도 아닌 것 같다.
자주 만나는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까닭을 물으니 텃밭을 가꾸는 일을 하다 다쳤다고 한다. 입원까지 했다니 심하게 다친 것 같다. 안부 전화라고 해야 하나? 위문 전화라고 해야 하나? 통화를 해본다. 완치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하단다. 보통 고생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후 두어 차례 더 통화를 해본다. 그러고는 점점 뜸해진다. 타인의 불편함이니 쉽게 잊어버린 것이다.
같이 운동하는 분의 동작이 살짝 불편해 보인다. 왜 그러냐니까 손가락을 조금 다쳤단다. “아! 그렇습니까? 조심하시지” 하고는 잊어버린다. 내 손가락의 불편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의 불편함만 그럴까? 그럴 리가 없다. 마음의 불편함은 더한 것 같다. 내 마음의 상처에는 심하게 민감하고, 다른 이 마음의 상처에는 심하게 둔감하다는 얘기다.
살면서 받게 되는 상처가 하나뿐이겠냐마는 그중에서 퍼뜩 떠오르는 것 하나. 젊은 시절 우연히 기차에서 공부 잘하던 동창을 만난다. 어렵사리 자리를 잡은 내 소식을 어디서 들은 모양이다. 약간은 깔보는 듯한 투로 “너는 빽이 좋은가 보네”라는 덕담(?)을 남기고 멀어져 간다. ‘빽이라니? 내 노력은 어디로 가버린 거지?’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은 잊히지 않는 상처가 되어 가슴에 남았다. 당연히 그 동창은 상처를 주려고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둔감한 것이었을 뿐.
최근의 일이다. ♬만나면 좋은 친구♪가 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 공통의 관심사에 관해 얘기하고, 맞장구쳐주고, 덕담을 주고받는 화기애애한 자리이다. 그런데 곁에 앉은 분이 맞은편에 있는 분에게 살짝 선을 넘는 말을 한다. 표정이 어두워진다.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으려는 배려로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그러나 정작 불편함을 초래하신 분은 전혀 그 사실을 모른다. 아니 모른 척하는 건가?
타인 마음의 상처는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케케묵은 옛날의 상처를 나는 지금까지 기억하는데 그 동창은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는 다른 이에게 그런 상처를 준 적이 없을까? 누군가가 내게 한 갑질에 분노하는 나는, 식당이나 가게 등에서 어쭙잖게 갑질한 적은 없을까?
누구나 자기의 불편함이나 상처는 잘 기억한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은 줄이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정말 괜찮은 사람은 자신의 불편함을 참을 줄 알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 그러면서 타인의 불편함에 공감할 줄 알고 타인의 잘못에 관대하게 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쉬운 듯한 괜찮은 사람이 되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그렇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사람으로서의 직무 유기일 테니, 내 불편함만이 아닌 타인의 불편함도 기억하는 사람이 되도록 애써보자. 잘 안되더라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런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