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벗어나 큰길 사거리 신호등으로 천천히 서행해가고 있는데 앞에 119 구급차가 서 있었습니다.
응급상황은 아닌 듯 경광등만 조용히 좌우로 깜박이고 있는데 그 앞의 차가 이상하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처음엔 119 구급차에 가려 그 앞에 다른 차가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차량 한 대가 머리를 빼꼼 내밀더니 이리저리핸들을 꺾으며 분주하게 제 시야에서 점점 몸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순간 어떤 상황인지 대략 짐작이 되었습니다.
뒤에 119 차량이 대기하고 있으니, 자신이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신호대기 박스 구간이 넓은 것도 아니고, 차량이 자신 외에 한두 대 더 있는 것 같아 보였는데, 운전자는 그 안에서 어떻게든 공간을 비워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조금 안됐다는 생각도 들고, 또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고.....
정작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앞의 운전자뿐만 아니라, 뒤의 구급차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응급이 아니라 그냥 정상적으로 신호대기하고 있는 것뿐인데, 앞의 차가 저리 애를 쓰고 있으니 아마 모르긴 해도 괜히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 상황들이 심심치 않게 전개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 직장생활도 그러니까요.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않으면, 불필요한 행동과 노력들이 소모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특히 위와 같은 상황은 소위 말하는 의전행사에서 많이 드러나는데요, 과도한 심리적 압박이 저런 상황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신분이나 직위에도 119 구급차 같은 압박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대하는 우리는 과도하게 90도로 허리를 꺾어 그 앞을 고양이처럼 지나가거나, 쓸데없이 뒷걸음질 치다 책상에 부딪히고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의도치 않게 여러 사람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까 119 구급차도 위급상황이었다면 분명 사이렌을 울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시그널이 왔을 때 그에 맞는 격과 예를 갖추면 됩니다. 그 외의 것은 순전히 우리의 약한 마음 때문입니다. 신분과 직위에서 오는 그 위압감 앞에 지레 겁먹은 우리의 마음 말입니다.
이 위축감은 마치 DNA에 새겨진 어떤 명령어처럼 허리와 목을 굽히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저만해도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고, 직위와 직급도 부여받은 사람이지만 윗사람의 방문을 노크하는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긴장되곤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모든 윗분들을 대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저의 경우는 오직 최고 결재권자에 대해서만 나타나는 사항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날 윗분의 심기를 살피고, 맑은지 흐린지 요란스럽게 전파하는 마이크 하나쯤은 다들 있는가 봅니다.
우스운 일이지만 저는 한 때 이러한 마음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깨보고자 조용히 제 앞에서 서류를 검토하시는, 아무 잘못도 없는 최고 결재권자의 머리통을 사납게 내려본 적도 있습니다. 결재를 받고 괜히 더 과장하여 휙 돌아서거나, 따지듯 질책하는 잔소리에 건성으로 "네, 눼"라고 말끝을 늘려 본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출근하다 갑자기 마주친 상사 앞에서 당황하여 인사도 까먹거나, 혹은 "어이쿠" 하며 길을 비켜주는 깍듯 공손함들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위급상황이 아닌데 본능이 그렇게 인식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