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웃통을 확 벗어젖히고 아랫도리를 쪽 벗어 내리면 될 일이다. 두 다리를 잠시 올렸다 반동으로 튕기듯 일어나 샤워실로 향하면 끝인데. 그러면 하루의 실패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를 골백번 외쳐봤자 침대 위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평일엔 기계처럼 수행되는 루틴인데 이상하게 주말만 되면 나태와 회피, 외면으로 베개가 둘둘 감긴다. 이봐, 그만하고 어서 샤워줄기를 맞으러 가자구.
샤워꼭지를 올리면 물줄기가 쏟아진다. 우선 샤워기 헤드를 아래로 향하고 온수 쪽으로 최대한 꼭지를 튼다. 살짝 발에 온도를 맞춰보고 뜨뜻한 기운이 퍼지면 아랫도리부터 쓰윽 한번 훑어주고 헤드를 걸이에 고정한다. 이제 물의 기운을 맞이할 시간이다. 세례를 받듯 머리부터 물을 맞는다. 샤워를 할 때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이 많다는데 나는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 대신 뱅글뱅글 돈다. 성수 세례를 받듯 정수리에 물줄기를 맞다 휙 돌아서서 뒤통수를 갖다 댄다. 그리곤 후면 승모근으로 물줄기를 내린다. 어제 어깨 운동 후 단단하게 뭉쳤던 근육이 노글노글해진다. 속으로 어흐 좋다 소리가 절로 난다. 광배를 활짝 펼치고 좁은 샤워부스 안에서 괜히 호날두의 호우 세레머니를 하며 물의 기운에 접신한다.
난 물의 힘을 믿는다. 부처님은 엄마가 믿으니까 그냥 믿는 척 흉내만 내고 있을 뿐, 사실 내 종교는 물신이다. 샤워가 익숙지 않았던 학창 시절만 해도 물에 젖는 것 자체를 찜찜해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샤워를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헬스를 하고부터인 것 같다. 그전엔 워낙 멸치 스타일이라 옷 벗는 것 자체를 터부시 했다. 축구를 하건 농구를 하건 운동이 끝나면 친구들끼리 사우나 가자는 소리가 많았지만 나는 빠졌다. 친구들 앞에서 삐쩍 꼰 육체를 보이기 싫었다. 제일 싫어하는 게 반바지였고, 앞으로도 난 반바지는 입지 않을 것이다. 헬스를 하고 그나마 사람다운 벌크가 형성되서야 나는 사우나를 드나들기 시작했다. 물을 맞으면 확실히 씻겨 내려가는 것들이 있다. 술에 절어 숙취가 만땅이어도 일단 물을 맞으면 몸이 회복되기 시작한다. 충혈된 눈에선 여전히 술이 꿀떡꿀떡 넘어오는데 샤워를 하고 나와 몸을 닦다 보면 컨디션이 한결 가벼워진다. 실상 숙취는 몸속의 영역인데 몸 밖에서 어떻게 했다고 그것이 나아졌다는 것은 설명할 길이 없다. 온도로 인해 혈액순환이 좋아졌다는 위키백과 설명은 충분치 않다. 숙취를 술병으로 치환하면 좀 전의 샤워 물줄기는 병 하나를 치료한 셈이다. 내겐 앉은뱅이를 일으키게 한 예수님의 힘처럼 느껴진다. 거기에 더해 물의 기적은 방금 전까지 불가능할 것 같았던 출근까지 가능하게 만들지 않는가. 무슬림에게 라마단의 시간이 있다면 내겐 샤워의 시간이 있다. 샤워 시간에 떠올린 깨달음만 해도 돈으로 환산하면 몇 천만 원은 가뿐히 넘길 것이다. 아직 글쓰기로 돈은 벌어보지 못해서 원고료로 환산할 순 없지만 업무에 적용시킨 예산절감이나 아이디어들은 만만찮다. 실제로 이 물의 신을 접신하며 유레카를 외친 얼마나 많은 예술가와 작품들이 있었던가. 그간 메시아가 없어 이 종교의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못했을 뿐, 이 시간에도 자신도 모르는 신을 향해 시선을 높이고 욕탕에 들어앉아 어흐 좋다 하고 저절로 터지는 방언을 주체 못 하는 수많은 예비 신자들이 널려있다. 신이 허락하신다면 내가 기꺼이 그들의 메시아가 되겠다. 이 글은 그 제단에 바치는 공물인 셈이다. 실제 물이 인류로부터 추앙받던 시기도 있었다. 4대 문명이 모두 물을 끼고 태동했으며 사람들은 지금도 물을 위해 콘크리트 신전을 짓는다. 생명과 번영이 가득했던 인류사엔 늘 물이 넘쳤고, 물은 태고적부터 낭만주의자, 그리고 모든 것들로부터 늘 무고했다. 난 여태 '바람 존나 부네'나, '구름 뭣 같네'라고 욕하는 사람은 봤어도 물을 욕하는 사람은 좀체 본 적이 없다. 흙빛 얼굴로 범람하여도 사람들은 언제나 짙은 먹구름이나 몰아치는 바람을 욕했다.
이렇게 좋은 물인데 단순히 피부에 접촉시키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섭취하는 것은 또 얼마나 유익한가. 사람이 나이를 먹어 그 육체를 한 40년 넘게 쓰다 보면 기능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가끔 색다른 감각을 깨우치는 경우가 있다. 오감을 넘어선 육감 같은 것인데 나의 경우엔 물을 느끼는 감각이 남달라 졌다. 어려서부터 나는 물 원샷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조금씩 나눠 마셔 겨우 반 컵정도 먹는 게 다였다. 지금도 물 한 컵을 꿀꺽꿀꺽 목젖을 출렁여 가며 한 호흡에 털어 넣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 나는 호흡이 차서 익사할 것 같은데 한 컵도 아니고 중세 캐슬의 망루같이 솟은 저 500cc 잔을 여유 있게 집어삼키는 사람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원샷을 일부러 연습해 본 적도 있다. 역시 목 넘김이 쉽진 않았다. 그러던 내가 물에 대한 인식을 바꾸자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물이 넘어가는 물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하자면 이런 식이다. 여기 물이 한잔 있다. 컵을 들고 들이키기 시작하면 예전엔 물을 마시고 있단 의식조차 없었는데 이젠 구체적인 부피감과 밀도감으로 물의 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입 가득 액체형 서브웨이를 베어 문 느낌이랄까. 예전엔 물 하면 목부터 시작이었는데 이제는 혀가 출발점이 됐다. 맛을 느낄 순 없지만 달고 쓰고 시고 쓴 영역을 지나는 물의 흐름이 혓바닥 전체로 느껴진다. 목을 타고 식도를 흘러 위까지 내려가는 액체의 유익성이 감각된다. 그저 마신다에서 어느 순간 '섭취한다' 혹은 '작용한다'가 되었다. 이것도 일정 부분 헬스 덕분이다. 헬스 후엔 영양 섭취가 중요한데 근육을 이루고 있는 70%가 수분이다. 운동 간에 들이키는 물은 중량 못지않게 근육의 펌핑을 더하는 스페셜한 만족감을 준다. '갈증이 느껴졌다면 이미 늦은 것이다'는 헬스인들 사이에선 이미 잘 알려진 불문율이다. 그만큼 수분 섭취는 내 몸에 중요하다. 지금은 물 한 컵을 넘기면 근육 사이사이에 수분을 보충하고 있구나를 넘어서 얼마 전 조금 높게 나온 고지혈 수치를 낮추는 물의 삼투까지 상상해 들어가곤 한다. 출근해서 맨 먼저 텀블러에 물을 한잔 가득 채우는 것은 이제 확고한 생활 루틴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물을 한 모금 꼭 마신다. 한 컵은 장기들이 너무 놀랄 것 같고, 마른 입과 생체리듬을 깨울 한 모금 정도면 족하다. 이 좋은 믿음을 딸 아이에게도 좀 전도하려 했으나 딸애는 이쪽이 영 이단시하는 콜라교 신자다. 설탕과 탄산에 빠져 좀처럼 유익한 잠언이 먹히지 않는다. 쯧. 그렇다고 조금 더 푸쉬했다간 질풍노도의 시기에 상호 종교전쟁이라도 벌어질까 봐 침묵하기로 했다.
한 여름날 숙직이 끝나고, 평일 대낮에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다 보면 아파트 전체가 다들 일하러 나가고 유난히 고요한 때가 있다. 이럴 땐 샴푸 소리가 유난히 사각거린다. 어찌나 사각거리는지 머리 위에 사과나무가 자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중년의 내게 무슨 영양분이 있어 사과나무가 자라겠냐만, 물줄기와 함께 하얀 사과향들이 꺄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발밑으로 미끄럼을 내려가는 걸 보면,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왜 오늘도 일하고 사랑하는지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물은 내게 활력을 준다. 어서 샤워를 하러 들어가야 겠다.
* 물의 힘 포스팅은 벌써부터 작성해보려 했으나 올해 개봉한 영화 아바타 : 물의 길 때문에 일부러 작성을 미뤄뒀었다. 영화의 흥행에 기대어 어그로를 끌기엔 다소 신성한 주제이며, 그것은 '물의 신께 나아가는 신실한 자세도 아닐 것이다'고 생각했음을 굳이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