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운동을 제일 좋아한다.
내 몸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부위도 등이다. 힘을 빼고 팔을 그냥 늘어뜨리면 어디 운동이나 했겠냐 싶은 어좁이지만, 흉갑을 열고 팔꿈치를 들어 올려 견갑을 한껏 쥐어짜면 꽤 울퉁불퉁한 등근육들이 솟는다. 나름 등신이라 불리길 소망하고 있다. 등운동을 좋아하게 된 계기도 등운동 효과를 제일 크게 봤기 때문이다. 가슴이나 하체, 어깨 운동은 투자대비 손익면에서 별로 재미를 못 봤다. 특히 종아리는 하나마나다. 나는 종아리만큼은 그냥 여자 같은 날씬한 각선미로 집사람의 기나 죽이기로 했다. 등운동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턱걸이를 빼놓을 수 없다. 등 전체의 프레임을 잡고 이소룡과 같은 멋진 광배근을 펼치기 위해서는 반드시 턱걸이를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본격적인 턱걸이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데드리프트를 언급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뒷면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늘 우리의 앞면에 대해서만 신경 쓴 나머지 대체적으로 목이 빠져있고, 등은 굽어있으며, 상대적으로 배가 나오고, 골반이 비대칭해져 있다. 이른바 후면사슬, 그러니까 우리 몸의 뒷근육에 대해 사실상 무지하다. 그래서 등운동을 하기 앞서, 우리는 우리 몸의 경추에서부터 승모, 견갑, 광배를 훑고, 척추기립, 둔근, 대퇴이두, 종아리로 이어지는 뒷근육에 대해 먼저 상상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전체사슬의 기능과 위치, 움직임에 대해 직설적으로 한방에 이해시키는 운동이 바로 데드리프트다. 당신이 데드리프트를 위해 바벨에 다가가는 순간, 그리고 셋업 상태에서 힘차게 일어서려는 순간, 바로 느낌이 온다.
'와 씨!'
어찌어찌 운동을 마치고 무사히 집에 돌아간다 해도 다음날 이 가르침은 다시 한번 뒤통수를 후려칠 것이다. 왜냐하면 경추부터 아킬레스건까지 구석구석 알이 배어 있을 테니까. '참 많은 근육들이 우리 뒷몸에 자리하고 있구나' 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 몸의 뒷근육이 얼마나 나약하고 형편없는가를 깨닫게 되면 비로소 등운동에 진중해진다. 벤치프레스만큼 데드리프트도 중요해지는 것이다. 일단 뒷근육에 눈을 뜨면 해야 할 운동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바벨로우부터 데드리프트, 턱걸이, 랫풀다운 등 해야 할 운동이 너무 많다. 이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해야 할 것 같고. 이때 '마! 쓸데없는 생각은 싹 다 갖다 버려' 라며 호통치고 나오는 운동이 바로 풀업(턱걸이)이다. 데드리프트가 뒷근육의 세상을 여는 '옙! 버디' 같은 준비 외침이라면, 턱걸이는 입문자들을 본격적으로 땡겨 올리는'라잇웨잇 베베! 같은 로니콜먼의 기합소리 같다.
등근육을 잡으면 어깨가 펴지고 더불어 가슴까지 우뚝 선다. 의자 깊숙이 엉덩이가 붙으며, 곧은 자세로 타자를 치고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될 것이다. 보고서에도 잔뜩 펌핑이 들어가 과장이나 부장의 잔소리 따위에는 주눅 들지 않게 된다. 가슴 근육이 셔츠를 터질 듯 타이트하게 만든다면, 등근육은 카시트를 꽉 차게 만들 수 있다. 후인하강 상태에서 견갑과 광배를 조여가며 움찔움찔 등근육 전체로 카시트를 움켜쥐는 기분은 맛본 사람만 안다. ' i'm the king' 같은 미친 자뻑에 콧노래가 절로 나올 것이다. 이상할 것 없다. 그게 바로 운동하는 맛이니까.
내가 아주 어렸을 적, 국민학교에 입학하기도 훨씬 전, 그러니까 생애주기에서 내 유년의 기억이 처음 시작되고 있을 무렵, 나는 큰댁에서 제사를 지내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그리고 동생과 함께 산길을 걸어 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시간이 늦어, 나와 동생은 깜박 잠이 들었다가 이제 막 깨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둘은 잠투정에 칭얼댔다. 엄마가 너그럽게 '업고 가요' 했고, 아버지는 '그럴까' 하고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앉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나는 '업힌다'의 개념을 몰랐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이전엔 수없이 업혀 지냈겠지만, 그땐 아직 내 기억 메모리가 작동하지 않는 아기 상태였을 테니까.
우물쭈물하는 나를 끌어당겨 아버지의 커다란 손바닥이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 일어서던 순간, 나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된다. 땅에서 둥실하고 떠오르던 기분, 넓은 아버지의 등판, '우와'하고 벌어지던 입,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전해지던 단단한 리듬, 아버지는 나를 업고, 엄마는 동생을 업고 마을 어귀까지 내려왔다. 그리 오래 업히진 않았지만 잠이 싹 달아날 만큼 편안하고 낯선 경험이었다. 정말이지 등에서 내려올 땐 너무 아쉬워서 다시 빨리 제삿날이 돌아왔으면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날 이후, 나는 다시는 아버지 등에 업혀볼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사내자식이 등에 업히는 건 아무래도 나약하다 생각하셨을까.
최근에 난 데드리프트는 하지 않고 턱걸이만 수행 중이다. 데드리프트는 생각보다 어려운 운동이어서 자세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난해해진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 데드리프트는 시작점에 대한 두 가지 이론, 즉 엉덩이 높이의 포지션에 대한 논란에 부딪히면서 엉망이 됐다. 그 이전엔 리프트의 중심을 발 중간에 넣기, 그리고 어깨선과 바벨이 수직선상에 오기, 딱 두 가지만 신경 쓰며 운동했는데 괜히 너무 깊이 파고들다 쓸데없는 티칭에 너무 과다 노출되었다. 이른바 역도식 리프트가 섞어들며 심플했던 운동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그 과정에서 날카로운 허리 통증을 두어 번 느꼈고, 나는 어느 날, 데드리프트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보수적으로 접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중량은 치지 않는다. 대신 턱걸이를 열심히 수행 중이다, 컨디션이 좋을 땐 종종 허리에 덤벨까지 걸어가며 무게 턱걸이를 진행하고 있다.
웨이트 훈련에서는 절대적으로 모멘트 암이 나서는 안된다. 몸의 중심에서 바벨이 멀어지는 순간, 어딘가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무게를 몸에서 최대한 가깝게 들어야 안전하고, 중량도 효율적으로 높여갈 수 있다. 이런 모멘트 암은 내 운동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이 운동을 부상 없이 오래 하는 것, 몸을 키우기 위해 웨이트를 다루기보다 웨이트를 통해서 몸이 자연스레 따라오게 만드는 것, 나는 웨이트의 어딘가에 욕심이 붙을 때마다 이 원칙에서 멀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물론 이것은 비겁한 타협이기도 하다. 이제는 더 몸이 커지지도 않으며, 중량도 정체된 지 오래다. 담낭수술 이후 빠진 근손실은 몇 년째 집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대사기능에 뭐가 하나 빠지니까 단백질을 때려 넣어봐야 다 똥으로 나오는 기분도 든다. 나이를 먹어가며 매일 쪼그라드는 느낌도 나는데, 어느 순간 이 모든 게 다 자연의 이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죽하면 그 몸 좋은 추성훈도 시지프스의 공 굴리기 앞에서 무릎까지 꿇지 않았나. 장경인대가 땡기거나 왼쪽 발목이 시큰거리고, 또는 오른쪽 손목에 통증이 올 때마다 점점 더 중량과 횟수를 줄여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비록 점점 더 약해지는 낭패감이라 하더라도 나는 이 운동을 조금 더 오래 즐기고 싶다. 이젠 아예 전략을 바꿔 '오래 사는 것이 더 강한 것 아닐까' 하는 괴상한 명제로까지 접근해가고 있다. 거대한 보디빌더의 몸을 갖지는 못할지언정 그들보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것은 어쩐지 경쟁해볼 만하다.
사실 몇 년 전부터 내가 신체적으로 전환점에 들어섰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매일 중량으로 나를 체크해 보곤 한다. 내가 들어 올리는 스콰트와 벤치프레스의 무게가 줄지 않는 한 나는 후퇴하지 않았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이러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설명하긴 힘든데 이것은 일종의 스테미너에 대한 흔들림이다. 운동의 열의가 확실히 예전만 못하다. 에어컨도 없는 낡은 휘트니트센터에서 땀을 뚝뚝 흘리며, 무게를 이기지 못해 산소를 찾아 헐떡이던 복압이나 파이팅들은 이젠 사라졌다. 확실히 뭔가가 빠져있다. 불쌍하게도 나는 그것을 뭐라 단정 짓지도 못하겠다. 오직 등만이 내 신체 중에서 그 거친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되새겨주고 있을 뿐이다. 오직 등만이 배신하지 않았다. 등근육을 위해 희생한 어깨와 팔꿈치에 감사를 표한다. 두 부위는 아직 여력이 남아있다. 이 둘만 버텨준다면 등근육은 몇 년은 더 내 뒷면을 가꿔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떤 연예인도 자기는 등운동만 한다고 했다. 누구였더라. 이서진이었던가.
자! 이제 다시 등짝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