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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May 06. 2023

혼밥 VS 혼술

목포에서 나주로 가는 도로는 「영화 300」의 크세르크스 왕의 대사처럼 '나는 관대하다' 를 연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분명 70km 제한 속도인데 도로 폭에 비해 차량 밀도가 낮다 보니 120km도 무난하겠다 싶었다. 호남 대표 평야지대라 시선도 넓게 터지고, 운전하는 입장에선 도시로 접근하면서부터 배려받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가는 길에 영산강 대교를 건넜다. 수량이 풍부한 게 넓은 강이 더 넓어 보였다. 나주엔 곰탕 먹으러 가는 길이다. 다른 건 없고 오직 나주곰탕.


나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하얀집을 찾았다. 점심 언저리라 평일임에도 줄들이 늘어서 있다. 살짝 이슬비가 내려 몸도 으슬한 게 곰탕 먹기 딱 좋은 날씨네. 대충 블로그 보고 찾아왔는데 꽤 유명한 집이구나. 4대째 내려온 110년 맛집이란다. 줄이 지루하다 싶을 즈음, 단체로 한 무더기 손님들이 빠진다. 자리를 하나 잡고 앉았다. 국밥이 나온다.


- 나주 곰탕 -



원래 고기 삶은 물을 좋아한다. 자칭 국밥충 아닌가. 국밥충이라 자처하면서 목포까지 내려왔다 나주곰탕을 안 먹고 가자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주곰탕 때문에 반나절 일정을 포기했다. 토렴에 대한 약간의 로망 같은 게 있다. 대충 맛은 짐작되지만 직접 맛보지 않고서는 해소될 수 없는 갈망 같은 것이다. 토렴 자체의 퍼포먼스도 훌륭하다. 카메라 느린 동작에 잡힌, 뚝배기를 오가는 곰탕 육수와 밥알들의 회오리를 보고 있자면 이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국밥이라는 생각이 든다. 돼지국밥을 비롯해 수많은 해장국을 접해보았지만 국밥계의 메시, 원조 나주곰탕을 먹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국밥의 세계를 논할 수 있으랴. 혼자 앉아 국밥을 내려다보며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깍두기와 김치, 그리고 국밥 한 그릇. 단촐하지만 뭐 하나 부족하지 않은 느낌이다. 국물을 한 수저 떠보니 간이 잘 맞은 설렁탕 맛이 난다. 하지만 거꾸로 설렁탕 국물로 이 간을 맞추라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다. 그런 맛이다. 고기가 푸짐하고 밥알은 그냥 술술 넘어간다. 애초 토렴의 목적이 목넘김이란 생각이 든다. 요즘 아침엔 늘 누룽지를 끓여 먹고 있는데 밥을 물에 말면 위 건강에 안 좋아 그렇지 세상 편하고 맛있게 넘어간다. 국밥 한 그릇을 그야말로 들이마셨다. 슴슴하면서도 고기의 깊은 맛이 우러나고 아주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좋은 맛이다. 나주 사람들은 좋겠다. 이런 국밥집을 가까이하고 있어서. 김치 또한 일품인데 완전히 푹 곰삭기 직전의 묵은지다. 국밥과는 더없이 찰떡궁합이다. 모처럼 인생 국밥을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일부러 먼 길 찾아온 보람이 있네. 배를 채우고 나온 나주는 확실히 '관대하다'. 더 둘러보지 않아도 나주의 모든 것이 설명된다. 난 미련 없이 광주로 출발했다.



혼자 나와보니 진짜 문제는 혼밥보다 혼술에 있었다.

광주에 도착해서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고자 거리에 나왔다. 중심 상업지역 광주 거리는 흥성흥성 했다. 목포서부터 아침과 점심을 국밥으로 때웠더니 낙지볶음 같은 매콤한 게 먹고 싶었다. 서너 블록을 뒤져보았으나 적당한 집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혼자 오마카세집이나 참치집은 못 들어가겠다. 결국 돌고 돌아 또 국밥집에 들었다. 대신 메뉴는 고추 다대기 듬뿍 올린 북어 콩나물국. 국밥 하나 달랑시켜놓고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기 뭣해서 소주도 한병 시켰다. 세상에~ 밖에 나와 내가 혼술을 다 하네. 혼밥도 혼밥이지만 혼술이라는 상황이 적잖이 고무적이다. 고깃집이라 따로 방이 있고 홀에 나와 먹는데 다행히 자리마다 칸막이가 있어 위화감은 덜 했다. 국밥 한입 넣어보니 '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전라도는 하여간 기본 맛 이상은 다 하는구나. 어. 여기도 묵은지가 나오네. 전라도는 특히 김치가 맛있다. 나주처럼 여기 묵은지도 기가 막히다.


혼술은 취기가 빨리 오른다. 혼자 먹다 보니 대화가 생략되고 잔과 잔사이의 텀도 짧다. 두 잔 먹었는데 벌써 취기가 확 오르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간 먹어온 본새를 봐서는 주량이 소주 한 병은 된다고 생각했는데 소주병 좁은 목을 이제 갓 통과한 남은 용량을 보니 한 병이 만만찮다. 어? 이거 한병 못 먹겠는데. 갑자기 '혼자 먹어봐야 자기 주량을 알겠구나' 하는 생각이 확 들었다. 석 잔 째 잔을 들이켰다. 갑자기 소주 알콜 냄새가 역하게 넘어왔다. 한 병이 버겁다. 도와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간 회식 때 보여준 퍼포먼스는 뭐란 말인가? 적게 잡아도 소주 1병 반은 거뜬하게 넘겼는데. 이럴 리가 없는데. 속이 비어서 그런가. 난 잠시 소주 대신 국밥을 연신 퍼 넣었다. 속을 조금 채우고 다시 한번 소주 한잔을 털어 보았다. 역시 힘들다. 소주 한 병 용량이 360ml, 소주잔으로 7잔 반이 나오는데 그건 잔을 가득 채웠을 때의 일이고, 난 지금 6배~7배 잔 (2/3잔 정도)을 따르고 있으니 거의 14잔 정도를 마셔야 한 병을 마시게 된다. 어이쿠. 그럼 아직도 10잔 정도를 더 먹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지금 컨디션이라면 불가능하다. 뭐야. 그럼 내가 소주 반 병도 못 마시는 인간이었단 말야. 충격적이다. 술을 잘 먹고 못 먹고를 떠나서 이렇게 되면 내가 나라고 인지해왔던 구성요인의 일부가 made in korea 가 아니라 made in china 였다 만큼 배신감이 크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래 아직 성급한 판단일 수 있어. 차근히 마셔보자. 나는 심기일전하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잠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이쪽의 낭패감과 상관없이 가게 안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마음을 진정하고 늘 먹던 술자리의 환담 분위기를 생각하며 적당한 기울감으로 잔을 넘겼다. 한차례 휩쓸고 간 충격파 때문이었을까. 다섯 번째 잔은 다소 쉽게 넘어갔다. 그럼 그렇지.


아무래도 혼자 손님이라 좀 급한 마음이 있었나 보다. 다섯 번째 잔 이후로는 그래도 이전 잔들 보다는 쉽게 넘어갔다. 그리고 1/4일 병쯤 남았을 때 갑자기 시야가 맑아지더니 기분이 업(up)되기 시작했다. 여긴가 보다. 대전환의 희망봉이. 중간까지 먹다 포기하려 했는데 어쩌다 챌린지가 되어 새로운 항로의 개척 가능성을 확인한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된 기분이다. 그대로 쭉 달려 마지막 한 잔을 남겨놓고 난 삐대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은 지 채 1시간이 안 돼서 이대로 나가봐야 갈 데도 없고, 마지막 남은 1잔의 여유로움을 최대한 길게 가져보자는 심산이었다. '나 이 잔 먹으면 빼도말고 딱 주량 한병이야. 훗' 혼자 의기양양 우쭐해 있는데 갑자기 여스님 한분이 다가와 염주를 내밀며 시주를 부탁한다. 어이쿠, 지금 현금이 없는데. 완곡히 거절했더니 옆 커플 한쌍이 나를 대신해 사준다. 좋아, 막 잔은 당신들을 위해 건배,  취했나. 멋진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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