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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죽을 나이가 아닌데'의 죽을 나이는 언제쯤일까?

폭싹 속았수다

by 긴오이

'아직 죽을 나이가 아닌데....' 라고 H는 생각했다. 말하자면 생면부지의 남인데도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 것을 보면 그녀의 때 이른 죽음이 다소 충격적이긴 했나 보다. 클릭해 들어간 모니터 화면 속에서 그녀는 단아한 얼굴로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 어디에도 죽음의 그림자 비슷한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잡티 하나 없는 하얀 피부나, 그로 인해 더 돋보이는 빨간 입술 같은 것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이런 건 도저히 영정사진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이런 풋풋함을 그냥 던져버릴 만한 작용이란 건 도대체 어떤 힘일까. 최대한 객관화해 봐도 H는 그냥 '팔자'거나 '운명'이란 결론에 가 닿았다. 그런 허망한 결론에 가 닿자 또 한 번 서글픔이 밀려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그녀가 한 십 년만 더 살았으면, 그래도 같은 결론에 가 닿았을까란 아쉬움이 남았다. 이런 건 순전히 남겨진 자들의 관점이란 걸 알면서도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다.


합당한 '죽을 나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겠지. 그래도 한 90살쯤 살면 사는 것도 귀찮아지지 않을까. 어디 하나 고장 나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노쇄한 몸엔 그저 외로움과 약봉지들만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테니. 그땐 누가 어디 갈 데가 있다고 손목을 잡아끌어도 그냥 쿨하게 앞장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생기 넘치는 그들은 다르지. 그 빛나는 얼굴들을 봐. 그 두 눈이 영원히 감겨버렸단 사실이 난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죽음에 대한 심리적 저항선이 있다면 몇 살 쯤일까. 50, 60? 요즘엔 60도 한창 나이라는데 그건 너무 이르지 않나. 한 80살쯤 되면 그럭저럭 억울움이 덜 할까. 정말 그거면 되나. 그녀가 떠났단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건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비통과 슬픔에 싸여 있을 그녀의 가족들. 순탄한 인생의 여정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소소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길 바랬을 그녀의 가족들. 단 한 번도 그녀를 앞서 보낼 일 같은 건 절대 떠올려 보지 못했을 그녀의 가족들. 지금 어디서 그 황망한 비통에 맞서 한 십 년만, 아니 한 오 년만이라도 하고 절절한 셈을 더하고 있을 그녀의 가족들. 조금 독하게 마음먹어서 그 애만 아니라면 세상 누구도 상관없을 것 같을 그녀의 가족들. 이런 것들을 떠올리는 일은 정말 슬픈 일이다.


어제는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를 보는데 '살민 살아진다'라는 말이 나오더라. 육지에선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 있잖아. 어린 아들을 떠나보내는 박보검이 사망 신고서를 작성하며 그 어린 이름을 어루만지다 그무너져 우는데 내 속에서도 꺽꺽 소리가 들리더라.


'폭싹 속았수다' 의 제6화를 보면서 H는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를 떠올렸다. 고로에다 감독은 이 영화 제작 비하인드에서 실제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나름대로 궁리하였고, 그 결론으로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다. 다층적 인생의 진리를 그렇게 한 줄로 명쾌하게 결론 내린 고로에다도 대단하지만, 그걸 한번 더 꼬아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설정으로 비극미를 한층 더 끌어올린 각본력도 실로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무미하게 흘러간다. 터지는 오열이나 눈물방울 하나 없이 잔잔한 일상으로 일관한다. 결국 '살민 살아진다' 를 카메라 속에 성공적으로 담아냈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특수한 비애의 한 장르를 '살민 살아진다' 같은 무심한 주제로 툭 읊조릴 때 거기 담긴 오랜 함축의 지층을 우리는 어디까지 짚어낼 수 있을까. 그 지극한 일부의, 특별한 공허를 연기한 연기자들도 실로 대단하다.


어느 댓글에서 아이유 얼굴에 최근 故 최진실의 얼굴이 비친다는 글을 봤다.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먼저 떠난 그녀와, 그녀를 따라간 그녀와, 그리고 수많은 그들이 생각났다. 너무 어린 청춘들, 아름다웠을 삶들. 사실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아도, 수명을 그대로 누리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위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들. 갑자기 그런 것들이 몰려왔다.


'그는 사랑받지 못했고, 성공하지도 못했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살았다' 존윌리엄스「스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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