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붙으면 글은 더 예뻐진다.
색조를 더한 애인의 얼굴처럼 글의 생기나 분위기가 한층 더 밝고 섹시해진다. 영감(靈感)적인 면에서도 그림은 글쓰기를 보조할 수 있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아니고서야 글쓰기도 벅찬데 그림까지 직접 그릴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많은 브런치 작가들이 출처까지 걱정하며, 글에 어울릴 이미지들을 고심하며 고르고 있다. H도 최근에는 픽사베이(Pixabay)나 언스플래쉬(Unsplash)에서 많은 애인들을 데려왔다. 예전엔 네이버 블로그에서 공짜 사진들을 종종 골라왔는데 글은 브런치에 걸며 그림만 훔쳐오는 것 같아 영 찜찜했다. 요샌 이 얌생이 짓이 발각됐는지 네이버도 내게 조악하고 유료인 사진들만 보여준다.
유화나 수채화는 숙련도가 높다. 초보자가 접근하기에는 거리감이 있다. 그래서 H는 어반 스케치를 선택했다. 밀도 있는 글래머보다 라이트 한 슬랜더를 택한 것이다. 글과 매치가 안되더라도 글이 살고 있는 도시나 풍광정도만 그려내도 그만이었다. 어쨌거나 그림은 슬램덩크처럼 '왼손은 거들뿐'이었으니까. 시간도 많이 투입할 순 없어서 금방 캐치되는 현장성이나 즉흥성들이 중요했다. 어반 스케치는 그런 점에서 여러모로 제격이다.
글이 안 풀릴 때, 그것들을 이어 붙이는 영감들은 항상 밖으로부터 온다. 시선을 들면 창밖으로 보이는 무심한 물상들. 계절이나 날씨, 횡단보도, 빛과 개들, 사람들... 이런 것들에서 오는 관찰이나 원근들은 글쓰기의 초조함을 잠시 밀어내 준다. 뭉친 목근육을 풀며 그런 이미지들에 잠시 고개를 들고 있노라면, 내가 속해있는 시공간들의 현장감이 그림처럼 소환된다. 놓쳤던 글들의 신경이 딱하고 붙는 순간도 그런 페이드 인(fade-in) 전환일 때가 많다. 응, 담배 아냐.
업무에도 글과 그림은 많은 도움이 된다. 하기야 요즘은 챗지피티나 미리 캔버스도 다룰 줄 모르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 H는 최근에 건축에 관심이 많은데 건축은 여러모로 글과 닮아있다. 빚을 재료가 필요하고, 구조가 있어야 하며, 그것들을 빚어줄 조물주가 필요하다. 멋진 도시의 외관을 연출하는 데 건축만 한 게 없고, 그 멋진 도시의 미적 내면엔 언제나 글과 그림이 있었다. 행정가인 H가 글과 그림에 욕심이 많은 건 이런 것과 완전히 무관하지 않다. 지구단위계획이나 도시개발계획들을 들여다보면서 거기에 앉힐 심미적 영감들을 고민한다. 문장과 스케치의 두 선으로 그려진 멋진 도시의 아우트라인을 잡아보는 것이 H의 필생의 소원이다.
H는 가끔 자신이 순수예술보다는 행정적 소양으로써 글과 그림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드론처럼 하늘 높이 떠서 낙후된 도시의 도시계획들을 조감하는 것이 아니라 세련된 문학적 수사와 스케치로 붕 뜬 멋진 보고서 만들기에 더 골몰하고 있는 건 아닐까란 의심을 한다. 실현 가능한 도시의 조닝과 건축들, 도로망들에 대한 고민은 사업부서에 맡기고, 자신은 오직 편안한 기획자의 위치에서 윗사람에게 뽐낼 화려한 안목과 알맹이들만 눌러 뽑고 있는 건 아닌지 찔릴 때가 있다.
그래서 그런가. H는 요즘 그림은 그리지 않는다. 사실 귀찮다. 욕망도 부지런할 때나 유효한 요량이지, 게으르면 말짱 도루묵이다. 절실함이 없으니 이래도 그만, 저래도 흥이다. 조회수가 뜨지 않는 글도 언제 다시 신경줄을 끊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요즘엔 대신 조회 수 많은 유튜브를 끌어다 본다. 확실히 유튜브는 정보 전달의 직관성이 좋다. 정말 좋은 보고서를 만들려면 차라리 유튜브를 제작해야 하는 건 아닐까. 출근길에 상관이 뒷자리의 리클라이너를 잔뜩 젖히고 한 손으로 애청할 수 있는 유튜브형 보고서. 난 좀 못생겼는데 아침부터 기분 잡친다고 내 보고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어떡하지.
아. 그러면 나가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