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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트랑을 먹다

by 긴오이

백색 자기 잔에 커피를 따르다 H는 기겁했다. '와 커피색이 이렇게나 까맣다고?'


남수단 흑인 모델 니아킴 개트윅(Nyakim Gatwech)이 하얀 욕조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윤기 나는 까만색에 쫄아서 H는 괜히 커피에 슬쩍 물을 탔다. 원래 설탕 등은 추가하지 않는데 연유도 조금 넣어 봤다. 걱정했던 것보다 커피는 진하지 않았다. 산미도 탄맛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냥 까만 맛이었다. '괜히 쫄았어'


베트남은 '소스의 나라'라고 들어서 태국처럼 강한 향신료를 겁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모닝글로리(공심채) 볶음이 처음 나왔을 때 '이건 백퍼 무슨 고수 비슷한 향이 날걸' 하고 경계했건만 전혀 아니올씨다였다. 달콤 짭조름한 미나리 맛이 났다. 처음과 달리 접시가 언제 버겁냐 싶게 금방 동이 났다. 그 유명한 반쎄오는 생각보다 기대 이상이었다. 싸 먹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튀김 베이스의 소를 라이스페이퍼와 야채로 감싸니 뭔가 재밌고 건강한 식단같이 느껴졌다. 땅콩소스보단 '느억맘 소스'가 더 입맛에 맞았다.


<모닝글로리 볶음과 반세오>


쌀국수는 매일 호텔 조식에서 2그릇씩 먹었다. '이게 진짜 쌀국수의 로컬한 맛일까' 의심이 들어 일부러 쌀국수 전문집을 찾기도 했는데 크게 차이가 나진 않았다. 평타 이상은 다치는 것 같았다. 쌀국수의 독특한 향은 오로지 고수 때문이란 편견도 있었는데 그보단 '라임'이 맛의 근본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어딜 가나 쌀국수 옆엔 라임이 몇 조각씩 썰려 나왔다. 즙을 꾸욱 짜 넣고 퐁당 국물에 떨구면 감칠맛이 확 산다. 딸애는 '쌀무새야? 아빤 왜 그렇게 쌀국수만 찾아?' 라고 놀려댔지만 베트남에 왔으니깐 일단 쌀국수인 거다 이놈아.


<베트남 쌀국수>


블랙페퍼 크랩은 꼭 한번 먹어봐라. 크랩류라는 게 대개 먹고 나면 '먹잘 것이 없네, 손만 바쁘네' 뭐네 하지만 이 크랩은 순전히 블랙페퍼 맛으로 먹는 것이다. '마라'만큼이나 일생에 한 번쯤은 먹어볼 가치가 있는 소스다. 칠리소스 크랩도 크게 나쁘지 않지만 우리 입맛엔 전혀 칠리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리 배 터지게 먹어봐야 우리 돈 삼만 원이 넘어가지 않는 물가에서 유독 '크랩' 만이 독보적인 가격을 자랑하지만 먹고 나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질 것이다. 어디 가서 이 가격에 크랩을 먹어볼까. 전혀 아깝지 않은 투자다.


<블랙페퍼 크랩과 칠리 소스 크랩>


둘째 날엔 '분짜'를 먹었다. 여기 와서 가장 반전적인 맛이었다. 이름에서 짠맛을 예상했지만 예상외로 단맛이 강했다. 단 걸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의 극찬과 달리 H에겐 '불호'였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은 '단 맛이 베이스인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단 맛이 도시의 식도락을 지배하고 있었다. 공심채에서도 짭조름하지만 분명 단 맛이 느껴졌고, 반쎄오나 그 외의 여러 볶음밥, 그리고 느억맘 소스에서도 약간의 단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망고야 말할 것도 없고. 망고 커피, 코코넛 커피, 소금 커피 할 것 없이 다 단 맛이 강했다. 1일 1 망고의 나라, 1일 1 마사지의 나라, 역시 베트남은 달콤해.


<분짜, 코코넛커피, 망고밀크 주스>


베트남 하면 반미를 빼놓을 수 없지. '왜 반미일까? 지구상에 유일하게 미국과 맞짱 떠서 이긴 나라여서 그럴까, 그런 자긍심을 빵속까지 구겨 넣었나' 쓸데없는 고민을 하다 관뒀다. 아내가 바게트 빵에 고기나 야채 등 여러 가지 속재료를 넣어 먹는 베트남식 샌드위치라고, 여기 와선 꼭 먹어줘야 한다고 한참을 종알대는 바람에 유치한 의문이 금방 날아갔다. 프랑스 식민지를 겪으며 유럽식 식문화가 겹친 탓이었다. 베트남에 좁고 긴 꼬마 건축들이 많은 것도 프랑스식 세금 부여법, 그러니까 건물의 도로에 접하는 가로길이에 따라 세금을 붙인 탓에 생겨난 독특한 건축문화의 일종이란 소릴 들었다. 공공재인 도로는 동등하게 나눠 가져야 한다는 베트남식 건축법도 마음에 들었다. 맞벽이라 습도 조절을 위해 가로 건축의 앞뒤로 큰 창을 낸 나트랑의 여러 꼬마빌딩들은 도심의 이른바 '걷는 맛'들을 더했다. 걷다 보면 또 어떤 개성적인 발코니와 창들이 나올까 궁금해졌다. 식민지를 거치고도 꿋꿋하게 나름의 미적 베트남화를 일궈낸 기특함들이 돋보였다. '베트남이 이렇게 미식의 나라였단 말이지' 그럼 또 뭘 먹어볼까.


<소고기 반미와 베트남 초등학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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