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가본 적도 없고, 특별히 선호하지도 않지만, H에게는 그들 문화 중 부러운 게 하나 있다.
바로 '이타다케마쓰' 다
처음 이걸 들었을 때는 무슨 종특들도 아니고 식사 때마다 저걸 외치나 싶었다. 일본식 주기도문인가. 모든 일본 영화의 식사 장면 앞에는 어김없이 '이타다케마쓰'가 나온다. 젓가락을 양손의 엄지에 수평으로 끼우고 합장하듯 '이타다케마쓰'를 외친다. 거기에는 경건한 듯, 경쾌한 리듬이 있다. 자꾸 들으니까 이젠 아예 가스라이팅되었는지 꽤 괜찮은 문화로까지 여겨지게 됐다. '이타다케마쓰는' 식탐이 민망하지 않게 예의 차려준 이에 대한 감사도 확실하게 표현한다. 차리는 수고에 비해 식사 속도가 너무 빨라 감사의 인사 같은 건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우리나라에서 '이타다케마쓰'는 스페인의 '그라시아스'나 태국의 '싸와티캅' 처럼 그야말로 습관처럼 튀어나오는 인류애 가득한 일석이조의 더블 감사 구호 같다.
그날 샤워를 마치고 룰루랄라 아침 상을 차렸을 때, H에게도 하마터면 이 '이타다케마쓰'가 찾아올 뻔했다. 혼자 차린 밥상인데 누구에게 감사할 일은 아니고 뭐가 그렇게 들떴던 걸까. 문득 이건 내가 알고 있던 그 이전의 '이타다케마쓰'와는 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의 '이타다케마쓰'는 '한번 먹어볼까나' 나, '차려줘서 고맙습니다' 같은 휴먼적 차원의 그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음식 그 자체에 보내는 그냥 인사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H 앞에 놓인 달래장, 거기 싸 먹을 마른 김과 탱탱한 도토리묵, 살짝 데친 브로콜리와 간장 메추리알 장조림, 거기에 갓 지은 파로가 섞인 흰쌀밥과 된장찌개, 바로 그들에게 보내는 정다운 인사말이다. 우습긴 하지만 그때 H는 마치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가 된 기분이었다. 끼니를 챙기는, 바쁜 일상 속 누구에게나 오직 평등하게 주어진다는 현대인의 치유 행위. 바로 그 순간의 고양감이 '이타다케마쓰'였던 것이다.
"단팥은 만들 때 나는, 항상 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것은 팥이 보아왔을 비 오는 날과 맑은 날들을 상상하는 일이지. 어떠한 바람들 속에서 팥이 여기까지 왔는지 팥의 긴 여행 이야기들을 듣는 일이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언어를 가졌다고 믿어. 햇빛이나 바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 영화 앙 : 단팥 인생이야기 中 에서 -
분명 애들 소꿉장난 같은 유치함이지만 일본은 종종 이런 순수를 장르처럼 다룬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데 돈을 투자하다니, 정말 이런 영화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H는 냉담하게 비웃었지만 한편으론 내심 부러웠다. 이런 류의 정서를 H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쪽팔려서 그렇지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보며 눈물을 찔끔한 적도 있다. 김태리가 태풍에 쓰러진 볏단을 묶으러 논 안으로 들어설 때, 땅이 꺼지도록 내쉬던 한숨을 H는 이해했다. 저런 걸 경험해 본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될까. 온통 뻘로 뭉개진 논바닥에 자장면처럼 엉켜 붙은 볏단을 골라 묶어 세우는 것은 엄청난 고욕이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과 별개로, 이 원시적인 작업을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홀로 행하는 고독감이란. 별 생산성도 없어 보이는 일에 괜히 땀만 빼고 있다는 울화통과 함께 세상 혼자 뒤떨어진듯한 온갖 소외감이 밀려온다. 그런 환경에 놓이면 누구나 다 지나가는 바람과, 하늘과, 구름과, 가끔 튀는 개구리와 메뚜기와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런 독백이나 방백이 다 나의 고통이다 싶었는데 세월이 무르익다 보면 어느새 만물의 고통으로 둔갑하는 날이 온다. 자연 만물이 다 동무 같고 거기서 생태나 평화같은 가치들이 태동한다. 이런 건 고전적이고 뻔한 스토리같지만 꼭 필요한 가치들이다. 이런 걸 누구랑 얘기하나 싶었는데 현대 산업의 최첨병이라는 영화계에서 이런 이야기와 정서를 포착해 내는 감독들의 시선이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마치 챗지피티의 '지브리풍' 을 타고 오는 토토로를 만나는 반가움 같다. 그래서 H는 가끔 정말로 탄복한다. 이런 문화나 장르를 섭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타다케마쓰' 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