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깻모를 심었다.
엄마는 그 전날부터 깻모 타령이었는데, 무엇을 추심받고 싶은 건지 그 얘기를 열 번도 넘게 반복했다. "낼 아침에는 여보, 일찍 일어나야 돼. 당신이 먼저 H랑 골(밭이랑)을 따놓으라고. 내가 일 끝나고 와서 같이 거들테니까. 호젓하게 본가에 방문해서 두런두런 이야기 꽃이나 피워보려 했던 H의 기대는 산산이 무너졌다. 그냥 잘못 걸렸구나 싶었다. 그래도 지난주부터 저리 깻모 타령인데 조금 거들 수 있어 다행일까. 어쨌든 마음에 걸렸던 건 사실이니까. 이런 응어리는 돈보다 몸이 나서 풀어줘야 한다.
엄마는 기어코 새벽 4시 30분에 불을 탁하고 켰다. 진즉에 잠을 설치고 있던 H는 '내 이럴 줄 알았다' 싶었다. 얼마나 조급했으면 이 새벽에 불을 켜셨을까. 가뭄이 길긴 길었지. 그래도 이건 좀 너무 이른데, 좀 대충대충 사시면 안 되나. 그놈의 깻모가 뭐길래 사람을 이리 꼭두새벽부터 기상시킬까. 깻모가 무슨 이자빚도 아니고 어머니는 마치 대출상환 만기일처럼 깻모를 대했다. 사람을 저리 옹색하게 만드는 조바심의 정체가 궁금했다. 얼핏 보니 마당에는 한 판에 100 구멍씩 뚫린 모판이 족히 40판 정도는 넘어 보였다. 숫자로만 따지자면 오늘 최소 4,000 포기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벌써부터 허리가 아파온다. 엄마도 그걸 생각하니 아주 지긋지긋하시겠지. 농사일이란 게 원래 야속한 것 투성이어서 귀한 아들이고 뭐고 일손 하나가 아쉬울 때가 있다. '사람이랑 그릇은 일단 쓰고 보는 게 좋다' 고 그 애간장이 이해됐다. 그래! 일단 한번 가보자고.
H가 깻모를 아예 안 심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때도 옥수수 골 사이사이로 이렇게 깻모를 박았던가. 이건 뭐 아직 옥수수가 한창인데 억지로 이모작을 욱여넣는 격이었다. 옥수수도 언짢지 않을까요. 이렇게까지 살뜰하게 땅을 일굴 만큼,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라고 볼멘소리를 하고 싶었지만 분명 아버지는 "이것이 나의 방식이야" 라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레이(이정재)처럼 정색하실 것 같아 관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21세기에 아직도 이런 류의 노동이 있다는 게 H는 믿어지지 않았다. 옥수숫대의 높은 키는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데는 요긴했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무수한 도열은 기가 질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저 사이사이마다 다 깻모를 심어야 한단 말이지. 와! 이걸 언제 끝내냐. 물론 끝이 나긴 하겠지. 하루는 유한하니까. 하지만 그걸 견딜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지옥문이 열린 것 같았다.
옥수수 밀림은 생각보다 좁아서 호미질이 쉽지 않았다. 밭일용 쪼그리 의자에 앉아 중심을 잡아가며 왼쪽 오른쪽 번갈아 가며 땅을 파고 깨를 심다 보니 복근운동 러시안 트위스트를 수행하는 것처럼 광배와 옆구리가 쥐가 나려 했다. 한 칸 한 칸 나아갈 때마다 무릎을 펴줘야 했다. 다리로 혈액을 순환시키고, 동시에 뒤로 자빠지려는 몸통을 코어로 단단히 잡아줘야 했다. 그야말로 앉은뱅이 환자처럼 나아갔다. 땀은 쏟아지고, 옥수수 잎은 얼굴을 할퀴고, 옥수숫대에는 뭔 정체 모를 새끼들이 이렇게 무수한 알들을 까놨는지. 땀에 절은 피부에 그 알들과 거미줄 따위가 들러붙자 목덜미와 삼두께가 벌겋게 발진이 폈다. 그야말로 온몸이 그만하고 싶다며 '으아악' 소리를 지르게 느껴졌다. 이런 울화와 짜증을 숨기고 선한 아들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게 대견할 정도였다. 그래도 차오르는 원망을 부처 같은 얼굴을 하고 누를 수는 없었다. '아버진 하필 많고 많은 직업 중에 왜 농사꾼이 되셔서 이 고생을 시키는 건지, 남들은 어떻게 하면 좀 쉽게 살아볼까 요령이라는데 아버지는 무슨 똥고집이신 건지' 하는 생각들만 삐져나왔다. 못된 상념은 급기야 H를 어느 탄광촌 갱도까지 끌어내렸다. 남편이 이 고생인데 마누라는 저 밖 세상에서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시집와서 농사일 한번 거들어보지 않고..... '아니 근데, 엄마 아버지는 왜 며느리는 놔두고 나한테만 이 고생을 시키는 거야. 이것도 엄연히 차별이라고요. 이런 비생산적인 일에 저 같은 고급인력을 갈아 넣어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이쯤 이르니 그냥 막가자는 식으로 세상이 다 '시팔저팔' 같았다. 속이 펄펄 끓는데 옆으론 취향을 한껏 뽐낸 자전거들이 떼를 지어 지나갔다. 너무 상반된 풍경이어서 차라리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저 치들이 오늘 저녁 라이딩 회식에 싸 먹을 깻잎을 내가 좆빠지게 심고 있군'
아버지가 어디 계시나 둘러보니 인기척이 없었다. 시작은 같았는데 벌써 몇 이랑을 앞질러 버린 모양이다. 깡마른 다리를 접고 계실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아버질 지탱하고 있는 건 그 뼈에 달라붙은 건과 인대뿐이다. 근육은 다 빠지고 바람 빠진 노년에 아버진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아버지도 나처럼 온 세상을 다 저주하고 계실까. 평생 땅을 일궜는데 여전히 깻잎 한 장에 목을 매는 인생이라니. 그까짓 들기름쯤 사서 먹으면 안 되나요. 하지만 그런 건 H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거대한 질서의 순환 같아서 옥수숫대처럼 간단히 꺾을 수는 없고, 누구는 '죽어야 낫는 병'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혼돈의 옥수수밭으로 기어 들어오기 전 차라리 마지막 포옹이라도 나눴어야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숙명에 맞서는 낭만이라니. 이런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데.
아버지는 혼자 씨름하는 것보다 아들이 곁에 있어 덜 심심한 모양이었다. 허리를 펴고 잠시 쉬었다 하자고 했다. 엄마가 싸준 달큼한 빵과 냉수를 곁들여 10분간 휴식을 했다. 이런 시간엔 군대처럼 아버지와 같이 맞담배를 한 대 폈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아버지도 나도 담배는 끊었지만 이런 쓰디쓴 시간을 견디게 하는 건 몸에 좋은 홍삼 액기스 같은 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고지식함따윈 잠시 벗어던지고 이 혼돈의 카오스밭에서 우리 둘을 건져 올릴 강력한 각성제 같은 것이 필요했다.
"다만 옥수수밭에서 저흴 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