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나라
일론 머스크 못지않게 트럼프도 참 재밌는 인간이다.
이 인간은 취임하자마자 전 세계에 관세 폭탄을 날렸다. 보란 듯이 캐나다, 멕시코를 시범 케이스로 삼았고, 불법이민자 송환을 거부하던 콜롬비아 역시 관세로 무릎 꿇렸다. 허튼 짓하면 25% 관세를 더 추가하겠다니 그야말로 '나(미국)한테 까불면 재미없을 줄 알아' 다. 돈이 깡패라고 이 단순·무식한 양아치 짓에 전 세계가 골치가 아프다. 유치하긴 해도 이 노랑머리 아저씨가 휘갈기는 행정서명은 서슬이 퍼렇다.
중동이 즉각 휴전했고, 긴장한 러·우간 전쟁도 변화의 양상이 보인다. 철저한 자국 우선주의에 기반한 Give&Take 정책은 메시지도 분명하고 논리도 심플하다. 돈이 되면 동맹, 안되면 추심이다. 감히 미국 사회를 좀먹는 펜타놀의 유입 경로로 의심된다고. 그럼 어디 한번 죽어봐. 캐나다와 멕시코는 바싹 긴장했다. 세계는 초일류 강대국의 수장답게 그에 걸맞은 국제적 매너, 의무, 책임감을 살짝 기대했건만 역시나 그는 '내부자들' 의 이병헌처럼 '그런 달달한 것들이 여즉 남아있긴 한가' 하고 코웃음을 쳤다.
H는 그런 그가 밉지는 않다. 적의도 없다. 꾸러기 같은 표정에 앙다문 입매무새는 인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관상이지만 지도자로서 풍기는 그의 아우라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스탠스가 있으니까. 일대일로니, 동북공정이니 의뭉스럽게 슬금슬금 세계를 좀먹어 들어가는 시진핑보다야 '나 속물이야' 를 대놓고 선언하고 가장 미국다운 방식으로 미국다운 정책을 밀어붙이는 그가 한결 더 애민적으로 보인다.
자본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대체적으로 예측 가능한 인물이다. 불확실한 국제 정세 속에서 자국 경제에 언제 먹구름이 낄지, 어떤 눈보라와 폭풍우가 몰아닥칠지 대강은 예측가능하다. 튀는 언사가 문제지만 거기서 튕긴 불투명한 유막만 제거한다면 고난과 역경의 장애들은 그런대로 눈비벼가며 헤쳐 나갈 수 있다. 저녁이 있는 환율, 아침이 있는 교역이 가능해진다. 명세표를 들이밀고 '이젠 어떡할 거야' 내미는 으름장엔 불가항력이 있지만 미 대통령이 위대한 미국을 위하겠다는데야 뭐. 차라리 거기엔 비열한 의도나 불순한 음흉은 없으니 아쉬운 대로 앗쌀한 맛은 있다. 본질적으로 그는 비즈니스맨에 가까워 '오히려 다루기가 편했다'라는 어느 대통령의 회고가 떠오른다.
자본의 나라답게 미국을 다녀오려면 돈이 많이 든다. 경비 원조가 없다면 내 돈 주고는 못 가는 나라다. 환율마저 천정부지로 솟아서 어설픈 관광 목적이라면 차라리 유럽이 낫지 싶다. 하지만 나스닥이니, S&P500이니, 미 연방준비제도니(Fed) 하는 세계 금융 경제의 랜드마크들이 궁금하다면 뉴욕 월가나 워싱턴 DC의 거리들은 한 번쯤 둘러봐야 하지 않을까. 이 자본의 총아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것들이길래 내 주식창을 널뛰기시키는 건지. 기안 84 말대로 타임스퀘어는 그냥 어지럽기만 한 곳인지. 센트럴파크엔 어떤 식생들이 자라는지. 쉑쉑버거는 정말 끝내주게 맛있나. 누구는 팔자 좋게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라는데 난 박박 긁어 겨우 얻은 천운이니 망설임 없이 미국 여행을 선택했다.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봐야 할 곳이었다.
생각보다 미국은 선입견이 많은 나라였다. 무시무시한 입국심사로 잔뜩 겁을 집어 먹었건만 우리가 도착한 워싱턴 IAD 공항은 텅 비어 한산했다. 입국 심사도 심사대를 잘 고른 탓에 웬 인상 좋은 인도풍 아저씨가 딱 두 마디만 물어보고 패스시켜 줬다. 괜히 쫄았네.
미국인들도 상당히 친절했다. 점심 식사 후 동료 한분과 우리끼리 영어 주문 한번 해보자고 아무 식당을 골라 커피를 주문했는데 두 명의 웨이트리스가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뭔가 실수했단 창피함에 얼굴이 빨개져 도망 나오려 했지만 잠시 기다려 달라는 손짓과 함께 커피 두 잔을 내어왔다. 중간에 '드립(drip)' 이라는 단어가 들리길래 '뭘 또 손수 드립 커피까지야' 했더만 원래 커피는 메뉴에 없지만 '너희들을 위해 친히 한잔 내려줬어'란 뉘앙스가 풍겼다. 어디서 왔냐고 친절히 물어주기까지 했다. '싸우스 코리아'라고 답했더니 함박웃음이 폈다. '아이 라이크 블랙핑크' 라며 자지러졌다. 와 K팝이 이 정도라고.
사실 미국 하면 DC나 마블 정도를 떠올렸다. H가 아는 미국이라곤 거의 8할이 다 영화에서 왔으니까. 헐리우드의 액션, 멜로, SF를 빼면 이 나라에 대해 별로 식견이랄 게 없었다. 멀리 있어도 건축, 미술, 문학, 가톨릭 등으로 존재했던 유럽에 비한다면 이 나라는 트럼프처럼 격조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나 뉴스에서나 가까운 나라였다. 도착해서 우리 일행이 처음 한 행동도 우선 담배나 한 대 피고 보자였다. 펄럭이는 성조기, 복 받은 천조국의 나라, 기축통화, 자유와 민주주의, 다양성, 오스카 아카데미니 하는 것들은 아직 안중에 없었다. 오히려 그보단 오랜 비행 끝의 여독을 풀어줄 속 편한 면발이나 국물들이 급했다. 우리는 첫끼로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다. 이 비싼 돈을 들이고 와서 첫 끼니를 쌀국수로 때우다니 '과연 올만한 나라였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때 그 따뜻한 응대의 커피 한잔은 우리의 기분을 한결 낫게 해줬다.
미국, Dream Come True 의 나라, 이젠 그것도 다 옛 말이 되어버린 나라, 우리나라처럼 거기도 태극기 부대 아자씨들이 있는 나라, 메트로폴리탄의 규모는 거대해도 거리엔 구걸꾼들이 나뒹구는 나라, 대마초 향기가 무슨 샤넬넘버 5처럼 풍기는 거리, 거기서 좀 벗어나면 뭔 옥수수를 이렇게까지 많이 심을 필요가 있을까 싶은 나라, 레미콘이 한 시간 안에 도달할 수 없어서 목조 주택이 즐비한 나라, 디자인 개념이라곤 전혀 없는 싼 티 나는 목조 주택에 무슨 중앙 계단이 천국의 계단처럼 딱 3개만 놓여있는 나라. 총체적인 국가 역량은 대단해도 개개인의 삶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나라. 세계 유수의 대학과 거기서 퇴학당한 몇몇 천재들의 역량이 기가 막히게 드라마틱한 나라, 기축통화인 달러를 무지막지하게 찍어내며 세계의 무역과 물가를 뒤흔드는 나라.
거기서 빈센트 반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구스타프 클림프의 <Hope II>. 달리의 <기억의 지속> 등을 만났을 때 H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 복잡한 도시의 소음과 트래픽을 뒤로하고 이 진품들을 감상하며 어쩐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별이 빛나는 밤' 앞에서는 웬 여자가 입을 틀어막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확실히 미국은 도시개발이나 도시재생에 있어 특화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나라다. 맨해튼 허드슨 야드 재개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탄생된 베슬(Vessel)이나 스파이더맨에 나왔던 허드슨 강가를 따라 버려진 상업용 철로를 이어 덮은 '더 하이라인' 그리고 그 아래 '첼시마켓' 은 사람들로 한참 붐볐다. 타임스퀘어 광장에 들어섰을 땐 대낮에도 휘황찬란한 광고판으로 눈이 어지러웠지만, 귀에선 세계 언어들의 짬뽕 공장 같은 복합 외계어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태국어, 중국어,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 인도어, 독일어 등이 마구 뒤섞여 강물처럼 흘렀다. 그야말로 인종과 언어의 소용돌이가 휘돌다 일시에 빠지고, 그 자릴 또 다른 소용돌이가 메우는 격이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H는 그 광장의 한가운데서 동전 몇 개를 공납하고 공연자들과 함께 몇 초간 탭댄스를 췄다. 멋진 경험이었다. 좋기만 하구만 기안 84 새끼.
뉴욕 관광의 핵심은 하늘과 땅과 강을 연결지은 3차원 요소가 핵심이다. 브루클린 브릿지나 맨해튼 브릿지를 지나 유람선을 타고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오면, 그 유명한 덤보의 뒷배경으로 두 브릿지들의 멋진 자태들이 구도를 잡아준다. 거기엔 온갖 인종들의 스마트폰 셔터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뉴욕의 밤엔 멋진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깎아지른 높이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도시엔 관광객 유치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언제나 사람들로 넘친다. 관광을 배우러 여기에 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뭘 모르고 오는 것이란 걸 알았다.
고백하자면 미국 여행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스테이크였다. 본토의 역사 깊은 스테이크 하우스를 꼭 한번 방문해 보고 싶었다. 단백질 성애자로서 포크와 나이프를 야무지게 쥐고 정장을 갖춰 입은 서버가가 정성스럽게 서빙한 미디엄 레어의 드라이에이징한 안심을 꼭 한 번 썰어보고 싶었다. H가 미국에 와서 기대한 가장 큰 호사 중의 하나였다. 그런 면에서 뉴욕 갤러거 스테이크 하우스에서의 식사는 우아하면서도 정말 끝내줬다. 그 부드러운 안심의 풍미에 한번 놀라고, 화장실에 갔다가 가슴 높이께까지 올라오는 거대한 소변기통에 또 한번 놀랐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미국은 화장실이 왜 이리 큰지 모르겠다. 공공시설의 화장실은 하나같이 한 10평쯤은 돼보였다. 어마어마한 건폐율의 연면적이었다. 이상한 것은 그렇게 넓은 공간에 소변기는 달랑 2개 정도, 그리고 좌변기가 놓인 화장실칸은 대충 봐도 4평 남짓이 넘었다. 변기에 앉으면 그야말로 문이 저 앞에 있었다. 누가 노크를 하면 어쩔 수 없이 헛기침을 하는 수밖에.
이 거대한 땅덩이의 나라엔 아직 손도 못 대본 미개발지가 국토의 2/3나 남아 있다고 했다. 땅덩이 만큼 음식들도 너무 많이 남아 돌아서 가는 곳마다 접시에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음식들이 쌓였다. 대개는 우악스럽게 다 씹어 삼키는 것 같았지만, 먹다 남은 음식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커다란 비닐 봉지에 담겨 모조리 쓸려나갔다. 그리곤 커다란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쓰레기 분리수거란 개념도 아예 없다고 했다. 땅덩이가 넓으니 어디다 다 갖다 파묻어 버리는 모양이었다. 이 지구환경 민폐자들. 부유한 나라의 부유한 사치들이 과연 합당한 신의 축복일까 하는 시샘이 들었다. 신께서 나라를 잘못 간택하신 건 아닐까. 우리나라의 안용복이 동해 바다를 건너다 실수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어야 했는데.
미국을 다녀온 것은 벌써 작년 9월의 일이다. 아직까지 별다른 소회를 남기지 못했던 것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많은 사진들을 찍었었는데. 그중 브루클린 브릿지 위에서 만난 도미니카 미녀들이 생각난다. 날 유튜버로 착각했는지 선뜻 내게 다가와 셀카봉 각도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자기가 쓰고 있던 진한 갈색 카우보이 모자를 착하고 내게 씌워줬는데 그때 웃던 하얀 치아가 기억난다. 우리는 함께 얼굴을 맞대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곤 곧 헤어졌는데 다리 끝에서 다시 조우했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 다시 만났다는 것이 너무 웃겼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엄지를 치켜들고 서로에게 '해브 어 굿데이' 를 외쳐줬다.
그녀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우리의 끝 인사대로 여전히 '해브 어 굿데이' 를 하고 있을까. 도미니카 공화국은 미국에서 꽤 가까운 나라인데 혹시 트럼프 아저씨의 심술이 뻗치진 않았을까. 그녀가 여전히 내 카메라 앨범 속에서처럼 환하게 웃고 있길 바란다. 진심이다. 그 외 거기서 스쳤던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모두, '에브리씽 해브 어 굿데이' 하길 바란다. 안녕. 아메리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