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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회한 남기지 않기

by 긴오이

아버지가 요즘 귀가 안 좋다. 왼쪽 귀가 잘 안 들리시는데 보청기는 한사코 마다했다. 웅웅댄다나. 의사 선생은 보청기 소리는 아예 다른 소리라 한 6개월 정도의 적응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건 나도 처음 들어 보는 소리네. 그러니까 의사의 말로는 보청기를 끼게 되면 아예 다른 채널의 주파수를 듣는 것과 같아서 듣는 행위 자체를 새로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걸 모르고 사람들은 2~3일 끼다 쓸모없다며 빼버리 경우가 많은데 그게 안타깝다더라.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 생각보다 귀찮다. 했던 말을 꼭 두 번씩 반복해야 하니 어떤 때는 H가 그냥 넘어가고, 어떤 때는 아버지가 그냥 알아들은 척을 한다. 그러니까 대화 중에 말이 잠깐 끊기는데 중요한 의사표시가 아니면 그 침묵을 타협으로 보고 그냥 모른 척을 한다. 아무 일 없단 듯 서로 딴청을 피우다 슬쩍 다른 주제를 던지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갭(gap)들이 늘어날 때마다 곧 '올 게 오겠구나' 하는 상스러운 생각을 했다. 아주 기초적인 생각인데 머릿속 가정은 꽤 구체적이어서 이상하게 눈물을 뺀다.


'회한에 대해 얘기하자면 대충 이런 식이지. 지나고 나면 다 후회로 남을 것들. 왜 좀 더 적극적이지 않았을까. 행동하지 않았을까. 보살피지 않았을까.' 하는.


H는 공무원 시험을 치고 고향에 내려와 지금의 아내와 함께 본가에서 2년 더부살이를 했다. 아버지는 1층의 창고 한켠을 급하게 작은 원룸으로 꾸며 주셨는데, 그 신혼방의 천장에서는 매일 아침, 아침밥을 준비하는 2층 엄마의 '콩콩콩'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 밥을 다 차리면 '쿵쿵쿵' 발을 굴러 식사하러 올라오라는 신호를 주셨다.


아침을 먹고 H가 출근을 하면 아내는 혼자였다. 그 쨍한 시골의 마당 한켠에서 맥심 커피를 마시다 엄마와 상추를 뜯고, 풋고추를 따고, 달래를 캐고, 가지며, 오이며 따다 소박한 점심상을 차렸다. 가을엔 시아버지와 감과 대추나무를 털었고, 겨울엔 생전 처음 땅에 묻은 동치미도 꺼내봤다. 창고에 붙인 원룸이라 사계절 내내 손님들이 방문했다. 바퀴선생은 없었지만 돈벌레나 집게벌레, 거미나 개미는 늘 제 집처럼 드나들었고, 더러 침대밑에선 귀뚜라미가 현악 2중주를 들려줬다. 경기도 신도시 댁 아내는 그때마다 질겁을 했다. 꺅하고 H 품을 파고들거나 그게 아니면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며 2층으로 뛰어올라가곤 했다.


10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었지만 세대가 같이 사는 건 H네 뿐이었다. H는 종종 아버지 농사일을 거들었는데 딱 드라마에서 나왔던 전원일기 그 자체였다. 아버진 공무원 장남 아들을 둔 불암 선생 같은 풍채는 못 풍겼지만 그래도 가끔 H가 그 곁에서 삽자루라도 하나 들고 멀뚱히 서 있으면 양촌리 일웅이네 같은 이웃들이 은근한 시선들을 던졌다. 그건 다 곡진한 시선들이었는데 아들딸 모두 서울 보내고 홀로 남은 이들의 눈에 비친 일종의 동거(同居) 부재에서 오는 원초적 그리움들이었다고 H는 생각했다. 다들 훌륭한 자식들을 두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멀리 살았으니까. 3분이면 끝날 진료를 위해 양지마을 강씨 아저씨는 아침부터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그 옆집 옥천네 아줌마는 백내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최소 일주일에 두세 번은 내원을 해야 해서 걱정이 많았다. 자가 교통이 없으면 시골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H의 아버지는 그런 불편함이 없었다. 필요하다면 당일로 서울 아산도 척하니 다녀왔다. 농사일이 바쁠 땐 동네 전체가 서로에게 아쉬운 소릴 해야 하는데 아버지 곁엔 노는 손 하나가 있으니 아래층에 잠깐 얼굴을 내밀면 그만이었다. IT 전문가도 두 사람씩이나 있어서 농사일이나 집안일과 관련된 서류 처리들은 언제나 일사천리로 처리됐다. 옛말에 출세해서 부모의 이름을 날리는 것이 최고라고 했는데 그게 정말 지금도 유효한 잠언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린 게 아닐까. 조석으로 들여다본 동네는 딱한 처지들이 너무 많았다. 다들 왕년에 한가닥씩 하는 아저씨들이었는데 세월이 무상해서 그 젊음들이 다 꺾이고 해가 다르게 노쇠해가고 있었다. '이 새끼들은 아버지, 어머니 이 고생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네.' 같은 동네에 살던 친구들, 후배들이 때론 미워 보였다. 사정이야 어쨌든 요즘은 명절 때도 얼굴 보기 힘들었으니까. 수만 있다면 대신 나서 그 댁네 아들딸들이 되고픈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H는 2년을 살다 시내로 나왔다. 아파트에 당첨됐을 때, 아내는 임신 8개월의 몸으로 힘든 줄도 모르고 입주 청소를 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무리하지 말라며 대신 거들었는데 아내는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고 했다. 뭐가 그리 좋느냐니 '이젠 짜장면, 짬뽕 배달되니까 맘껏 시켜 먹을 수 있잖아요' 아내는 웃으며 답했다.


매주는 아니지만 요즘도 H는 종종 아버지 댁을 찾는다. 식구들을 데리고 일요일 저녁은 다 함께 먹고 내려온다. 한번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해물을 참 맛있게 드시더라는 아내의 수다가 정겨웠다. 그건 덩치 큰 행복까지는 아니어도 마음을 달뜨게 하는 이상한 즐거움을 줬다. 소소하나마 인생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란 안도감도 다. 나중에서야 뭔들 다 부족하게 느껴지겠지만 멀리서 부모의 신변은 걱정하되, 쉽게 고향을 방문하지 못하는 다른 이들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 그런 것들은 더욱 확고해진다.


부모 가까이 살며 설령 단순한 배탈일지라도 그들이 언제든 신호만 보내온다면 20여분만 운전하는 수고를 들여 부모님의 상태를 살필 수 있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나는 경험적으로, 또 본능적으로 이것이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만족감이 꽤 크다는 것에 놀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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