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상을 했다. 이게 얼마만의 상(賞)인지. 총 1,000여 편이 넘는 출품작 중에 최종 46편, 정확히는 26편 안에 들어 시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나름 훌륭한 경쟁률을 뚫은 것이다. 확실히 순위를 매기니까 메달 단상 위에 오른 것처럼 우월감이 차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팀장 승진 때보다 더 좋았다. 자부심이라는 게 단단한 자기애에서 나오는 건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나폴레옹은 자기 손으로 왕관을 썼다는데 H는 중앙부처장이 씌워준 왕관이라 더욱 좋았다. 잘 썼든 못썼든 수상을 하니 모든 건 다 셧업(shot-up) 되었다. 타이틀이 알아서 레드 카펫을 깔았다. H는 그저 쑥스러운 듯 손사례만 쳤다. "아휴 뭘 운이 좋았지. 비법이랄 게 있나. 그냥 열심히 쓰는 거지. 아냐, 아냐 등단된 건 아니예요." 진심이든 아니든 사방에서 축하의 말들이 플래시처럼 터졌다.
상 탔다는 소문 덕분으로 직장과 동료들로부터 소소한 명성도 얻었다. H는 이게 은근히 좋았다. 직급이 깡패인 곳인데 사방에서 존중의 냄새가 풍겨왔다. 명성을 가까이 둬서 나쁠 게 없으니까 상사들은 어쩌다 마주친 복도에서 다들 호의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H도 겸손하게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 잡았지만 전혀 저자세 같지 않았다. 부족했던 사내 정치력이 명성으로 커버되는 느낌이었다. 이쯤 되니 이쪽에서부터 모든 것이 관대해지기 시작했다. 대놓고 꼴 보기 싫었던 동료마저 더 이상 미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인색, 질투, 초조, 패배 같은 감정들이 다 하찮게 느껴졌다. 반대로 관용, 화해, 용서 같은 것들이 다가왔다. 수상의 여파가 이 정도라니 신경증 환자는 다 저리 가라네 뭐.
낯선 권위를 꿰차니 그간의 직분이 자잘해 보이기까지 했다. 본업이 이게 아닌데 실은 이것을 위해 달려온 것은 아닌가란 착각마저 들었다. 인사고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굳이 인사과에 연락해 수상 이력을 한 줄 박아 넣자 H는 이상하게 상쾌했다. 마.침.내 무언가를 끝마친 기분이었다.
H는 기관장의 스피치를 오래 써 본 터라 제법 '쓰네'라는 평은 들어왔다.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직장 내 세평이어서 세 평짜리 단칸방마냥 누추하기 그지없었다. 좁아터진 문장들의 세간이 드러날까 비루한 문고리를 꼭 걸어 잠그고 숨죽여왔다. 수상은 그런 새가슴에 개비스콘 열 알을 털어 넣은 듯 오래 묵은 체증을 쑥 내려줬다. '후-하'.
스타일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H가 시를 쓰게 된 것은 필연이다. 소외되면서도 멋진 건 이 세상에 오직 '시' 하나뿐이니까. 백석의 시구처럼 '하늘이 사랑하는 시인이나 농사꾼이 되리로다' 했다. 아니면 이상국 시인의 혼자 걷는 밤이 좋아 홀로 '문학의 밤이 될까.' 우리나라에선 아직까지 아무리 부지런해도 '문학의 아침'이나 '문학의 저녁'은 없다고 했는데 그 길을 고집스레 걸으며 가끔 즐거운 술잔을 받아볼까. 요란하지 않은 쓸쓸한 사랑을 받으며 H는 조용히 시를 쓰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제일 먼저 시를 통해 글빨을 인정받고 싶었다. 모든 시인은 소설을 쓸 수 있어도 모든 소설가가 다 시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어느 교수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어쩐지 시를 쓰면 산문쯤은 우습게 휘갈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를 먼저 써서 시인형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야말로 '하이브리드형 작가'를 꿈꿨다. 그렇다고 전업작가를 꿈꾼 것은 전혀 아니다. 현실적으로 글을 통해 먹고 사는 건 등짝 맞을 얘기니까. 나를 먹여 살릴 건 글이 아니라 돈이 란 걸 알았다. 그래서 H는 누구보다 일을 사랑했다. 일이 글을 푸는 원천이었고, 방해되기는커녕 오히려 일할 때 글이 더 잘 써졌다. 듀얼모니터의 한쪽엔 일을 놓고 다른 한쪽엔 글을 놓았다. 워라벨을 출근과 퇴근으로 나누지 않고 그냥 일터에서 양자컴퓨터처럼 0과 1로 서로를 공존시켰다. 일이 글이고, 글이 일이었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이 은밀한 공존을 누가 눈치채지 못하게 파티션을 조금 더 높였으면 할 뿐이었다.
글쓰기엔 아직 강박이 없다. 수상 이후 몇 달 동안 다음 챕터를 넘기지 못했는데 그냥 으레 그런 거니 했다. 브런치의 알람도 가볍게 무시했다. 너무 도취됐나. 재작년쯤 입상은 꼭 한번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걸 이루고 나니 없던 배짱이 생겼다. 아마 한강 작가님은 더 하겠지. 무려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아닌가. 차기작이 몇 년쯤 더 미뤄진다 해도 H는 이해할 것이다. 그럼 그럼.
요즘엔 많은 것들이 이전에 비해 점점 더 수월해지고 있다. 이것이 완숙이라면 거기에 글이 보태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든다. 글이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는 몰라도 당분간 글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마침 이번 상(賞)은 거기에 잠시 이정표가 되었다. 많은 것들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