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12월쯤부터 뭔가를 이야기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좀처럼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해를 넘겨서야 입을 떼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통상적 연대기순, 그러니까 지난 1년의 일직선 플롯에서 아직 뚜렷한 무언가를 포착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성급하고 초조했던 이유는 지난 시간에 대한 특별한 애정과 그것에 대해 뭔가라도 언급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이내 사라질 것 같은 염려 때문이라고 H는 짐작했다. 별 것 아니더라도 H는 그것들을 다시 한번 꺼내 보고 싶었다. 2024년은 그런 한 해였으니까. 분명한 반추를 해주지 않고선 쉽사리 떠나보내지도 못할 것 같았다. 가끔은 자신만의 진실이라도 내가 직접 듣게끔 스스로 증언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명확해지니까. 그런 명료한 것들을 움켜쥐고 새해를 시작하고 싶었다. 일출만큼이나 그런 게 중요했다.
지난 한 해에 대해 얘기하자면, 재충전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합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건 너무 자기중심적이니까. 그렇게 이기적으로 굴어선 지난 한 해를 관통해 온 여러 유익함들과, 관계들의 상호작용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젖과 꿀들의 시간으로서, 그것들을 흐르게 한 분명한 압착점이 존재했고, 그 압착점엔 주위 동료들의 다정한 인사와 언행들이 큰 몫을 했다. 그걸 언급하지 않고서는 어쩐지 견딜 수 없다. '오빠. 이번 수료 앨범에 20자 내외로 교육 소감을 적어내라는데 오빤 뭘로 할 거야'라고 S가 물어왔을 때, H는 전날 숙취로 끙끙 앓고 있었다. 속이 부대껴 대충 '재충전의 시간이었다고 해'라고 내뱉었었는데 그게 그렇게 후회될 수 없다. 그 즉시 다시 고쳐 달랬으면 어땠을까.
완전한 타인에 대해 얘기하자면 H는 언제나 거리의 가로수나 구름, 건물 같은 풍경을 떠올리곤 했다. 무심한 시각정보의 하나로 그런 것들은 H의 후두엽이 처리할 하나의 정보값에 불과했다. 그런데 가끔은 어떤 특별한 의식이 집중되어 그들 하나하나에 각각의 인격이란 걸 부여할 때가 있는데, 그런 순간의 마지막은 꼭 '저 사람들 눈에도 내가 그저 그런 풍경의 하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끝마쳐지곤 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혼자만의 상상놀이이면서도 어떤 양심적 가책, 그러니까 세상의 중심을 자기 멋대로 제 앞에 갖다 세운 것 같아 화끈함이 밀려오곤 했다. 그날 S에게 성의 없는 '재충전 드립'을 날렸을 때도 이와 비슷한 창피함을 느꼈다. 지난 시간은 온전히 혼자만의 것이 아닌데 그 공을 혼자만 독차지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스스로의 속좁음에 순간 움찔했다.
'와, 그땐 정말 매련없었지. 다들 뭐'
81명 교육생이 둘러앉은 워크숍에서, 그중에서도 8명씩 조를 이뤄 우리가 9분임으로 처음 모여 앉았을 때, S는 각자의 인상을 훑어보곤 혀를 찼다고 했다. '너도 마찬가지였거든' 분임장 J도 맞받아 쳤다. 정확히 2024년 2월 19일부터 10개월을 꽉 채운 12월의 어느 저녁이었다. 우리는 둘러앉아 마지막 회식을 하고 있었는데 다들 아쉬운 마음들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꿈같은 10개월이 이제 막 동나려 하고 있었으니까. 각자 치열했던 일터에서 벗어나 이렇게 긴 안식년을 가진다는 것은 쉽게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그야말로 다시없을 시간이었다. 그런 걸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한다니.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 한편으로 우리는 제대로 된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던 걸까. 꽤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미적 되고 있었다. 다들 좋았던 기억의 엑기스들만 우려내느라 주고받는 말들은 훈훈하기 그지없었다. 그때 처음으로 H는 혈연·학연 따위는 집어 치고 생사고락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좋은 친구들을 만들 수도 있겠다란 생각을 했다. 오히려 그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순수한 타인관계야 말로 하늘에서 내리는 눈발처럼 하얀 다정함의 진짜 결정체들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이것이 비록 찰나에 가까운 우발적 포옹이었다 해도 그 순간만큼은 서로의 팔들을 풀고 싶지 않았다. 밤은 깊어갔고, 가벼운 농담들이 잦아들었다. 서로의 온기들이 공명하고 있을 때, 10개월 동안 말이 없기로 유명했던 D가 언제든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말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D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나이가 제일 어렸던 S가 기특하다고 어깨를 두드렸고, 두 살 터울 위의 K와 B가 곁에서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힘껏 건배를 했다.
2024년이여 안녕! 우리 분임들 모두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