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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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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Aug 03. 2024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 그랬지...

교육생 동기 한 명이 카톡으로 동물타로 테스트를 보내왔다. 내 이미지와 비슷한 동물은?

'신비로운 도마뱀'


그림의 아래에는 이런 설명이 달렸다.

1. 생각이 엄청 많아요
2. 흑역사를 자주 떠올려요
3. 시뮬레이션을 잘 돌려요
4. 남들의 말이나 행동에 의미부여를 잘해요
5. 사람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져요
6. 스스로 모순적이라 생각해요
7. 이타적이면서 자기중심이고, 온화하면서 냉소적이에요
8. 가식 없는 솔직함을 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건 어려워요
9. 내면이 복잡해요
10. 타인의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알아요
11. 남들에게 민폐 끼치는 걸 정말 싫어해요
12. 혼자만의 시간이 방해받는 걸 싫어하지만 내색 잘 못해요


H는 '꽤 정확한데...'라고 생각했다. 특히 3번, 6번, 7번, 11번은 너무 자기 같아서 솔직히 좀 놀랐다. 타로는 그냥 어거지로 그림에 해석을 끼워 맞추는 억지 해몽이니 했는데 이지 신뢰가 갔다. 그나저나 1부터 12번까지 보니 도마뱀보다는 카멜레온이 더 어울리는 것 아닌가. 결국 상항에 따라 자기 모습을 감추고 색깔을 바꿔 입는 경우가 많다는 거잖아. 그리고 거기서 오는 일종의 자괴감에 자주 괴로워한다는 것 아닌가. H도 평소 그런 느낌을 많이 받는다. 혼자 있으면 왁자한 사람들의 모습이 부럽고, 또 막상 어울리면 혼자만의 시간이 그립다. 겉으론 이타적인 듯 하지만 사실 이기적인 면들이 많고, 그래서 타의적으로 셈적인 상황에 놓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럴 땐 솔직한 자기 밑바닥을 보게 되니까. 어쨌든 계산기를 튕기는 내면을 마주하기란 유쾌하진 않은 일이다.


 손해 보는 느낌이 싫다. 그것이 시간이든, 돈이든 내 노력과 열정이 들어가는데 인풋대비 아웃풋이 마이너스라는 손익계산이 면 확 짜증이 밀려온다. 괜히 사람이 싫어지고, 관계가 허무해진다. 그래서 되도록 누구에게 부탁도 하지 말고, 받지도 말자는 주의다. 그런데 세상이 꼭 그렇게만은 굴러가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손내밀 어야 할 때가 있고, 당연히 거절당하는 때도 있다. H같이 뭐든 의미부여를 잘하는 사람에겐 그 거절들이 큰 상처가 된다. 상대의 NO가 청천벽력같이 느껴진다. 공적인 업무야 그렇다 쳐도 혹여 '혹시 오늘 시간 있어, 한잔 할까' 같은 사적 영역에서의 퇴짜는 이상하게 잔상이 오래 남는다. 그런 무안함이 싫어 먼저 권하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그런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이젠 누군가에게 먼저 전화 걸기도 힘들고, 받는 것도 힘들다. 그래서 자신은 외부 자극에 취약한 사람이니까 되도록 사람을 안 만나는 것이 좋겠구나 싶었는데 캐릭터라는 게 또 그렇게 단순하지가 다. 이상하게 남들의 사정이나 곤란함에 관심이 깊은 것이다. 햇빛 쨍한 밝음은 알아서 밝겠거니 하고, 은근한 어둠과 그늘에 더 마음이 끌린다. 공자왈 맹자왈 보단 '누가 어쨌다느니, 저기가 거기를 어떻게 했다느니' 그런 얘기들이 재밌다. 업무에 있어서도 누가 뭔가를 고민하고 있으면, 제 일도 아닌데 괜히 개입해서 명쾌한 답을 내려주고 싶다. 그렇다고 옆에서 미주알 고주알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슬쩍 지나가며 '그거 저거잖아' 하고 넌지시 일러주는 그런 것 말이다. 하지만 상상해 보라. 그런  가당키나 한지. 담당자가 몇 날 며칠을 고민한 것을 마침 지나가는 과객처럼 평온한 표정을 하고 '그거 저거잖아' 할만한 일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H가 그런 쿨한 표정을 하고 '이거 저거야' 라고 했을 땐 몰래 숨어서 그 문제를 뜯고 씹고 살핀 몇 날 며칠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 것이다. 우아한 표정을 하고 무심한 츤데래 같아도 그 아랜 분명 바쁘게 허우적대는 백조의 두 다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H는 가끔  자기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정말 내가 무슨 만랩자같은 것을 꿈꾸고 있나' 싶기도 하고, 아니면 '정말 야누스의 얼굴을 한 못말리는 변덕꾸러기인가' 싶을 때도 있다. 이게 다 누구는 인정욕구가 깊어서 그런 것이라는 좁은 호리병 속에 이것저것 손에 쥐고 빼지 못하는 꼴이라니 참 모순되긴 하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좀 신경질적이고, 사람에 대해서도 별로 관대하지 못하다. 그런 제 속을 잘 알지만 이런 욕구불만은 쉽게 낫질 않는다.


고백하자면 교육원에 입교할 때부터 마음먹은 게 하나 다. '어디 나서지 말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왜냐면 도대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여긴 사람만 피하면 본래의 내면에 충실한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들 각 시군에서 모인 거니까, 여기선 어디 조용히 짱 박혀도 누가 굳이 눈치를 주거나, 특별히 시선을 끌 것 같지도 않았다. 괜히 나설 일도 없겠지만, 굳이 나서서 괴로울 일도 자처하지  않기로 했. 그런데 이상하게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시간에 궁금한 게 있으면 속으로는 말리는데도 결국 손이 올라갔다. '흥분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는데 교육원의 이상한 근태지침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차수마다 작성하는 설문지엔 그게 뭐라고 대충 '보통'이라고 체크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보통이나 해야지'고 왔는데 막상 그 보통이 잘 안 됐다. 드라이브니 T샷이니 골프 얘기가 나오면 왠지 맞지 않을 운동 같으면서도 '골프 수업을 들을 걸 그랬나' 흔들리기도 했다. 가끔 글 좀 쓰겠다고 도서관을 찾을 땐, 이자카야에서 한창 꼬치구이를 뒤집고 있을 어느 무리들이 떠올랐다. 그럴 땐 끼지 못한 이상한 소외감이 밀려와 마음이 어지러웠다. 결국엔 자신이 뭘 모르고, '여기 와서 소중한 관계 형성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런 마음을 이기려 가끔 얼커 하게 취하기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숙취에 시달리며 지난밤을 후회했다. 모든 게 중간이란 게 없었다. 못났다 못났다 하면서도 어느 한쪽으로 스탠스를 고정하기 힘들었다. 벅차게 하루를 꽉 채우고 싶으면서도,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에 눕고 싶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모순된 나날이 쌓여갔다. 그리고 H는 자신이 과하게 남을 의식하며 산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분임 공통과제가 나왔을 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했다. H는 굿판을 기다렸다. 누군가의 주도로 굿판이 펼쳐지길 바랐다. 마침내 자리가 펼쳐지면 조용히 일어나 약간의 조력을 자처하며 떡을 주워 먹을 참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졌다. '이러면 나가린데'... 살짝 눈치를 보니 다들 딴청을 피우느라 어색한 시간만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함께한 지 6개월이 넘어가는데 오늘은 다들 처음 만난 첫날의 얼굴을 하고서 서로를 모른 체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H는 자리가 불편했다. 역시 버티는 게 답일까. 그래야만 하나.


 H는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이 부족하다. 아니. 설득보다는 '후리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사람을 끌어당기는 인력은 없고, 오히려 밀어내는 척력이 강하다. 그러니 뭔가를 도모하는 일이 H는 버겁다. 바람을 잡지 못하니까 '이것 좀 해보자거나, 저것 좀 먹어보자거나' 같은 말들이 쉽사리 튀어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이 재미없는 과제를 가지고 뜨뜻미지근한 인간들을 어떻게 달아오르게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결국,


"초안은 내가 잡을게"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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