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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서울 살기

by 긴오이

올림픽 대로를 타다가 갑자기 '이 도시에 몇 년은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마침 아내의 운전기사를 자처하고 피부과를 따라나선 참이었는데 저 건너 강변북로를 바라보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평생을 강원도 촌놈으로 살아왔는데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맥락 없는 뜬금포에 H도 살짝 어리둥절했다. 그냥 아내를 따라 얼굴에 쥐젖 좀 몇 개 빼고, 그 뭐냐 아이피엘인가 뭔가 좀 받고 내려가려 했는데 갑자기 서울 천도라니.


안티에이징이라면 H도 요즘 관심이 많다. 가급적 젊고 깨끗하게 살고 싶다. 그런 삶은 전원생활로 보장받을 거란 신념이 있었는데 일 년에 몇 번 올라오지도 않는 서울에서 갑자기 생의 전환을 꾀하다니. 모든 생각에는 발단이 있다. 이 발칙한 즉흥에도 뭔가 도화선이 있을 텐데.


그때 자동차 안에서 Nina Simone 의 필링굿(Feeling Good)이 흘러나오고 있었던 거야. 재즈 브라스 선율에 맞춰(아마 트롬본 아닐까) 빠밤 빠밤 하고 다운되다 마지막에 저 끝내주는 시몬의 메리얌마 메리얌어어어~ 의 후렴, 필링~굿이 읊조려지고 있었던 거지.


어떤 상념들은 폭풍처럼 몰아친다. 아침 출근 트래픽을 막 떠나보낸 올림픽 대로는 햇살에 온통 반짝였고, 한강 위로 새들이 날고, 따라 H의 기분도 한껏 고양됐다. 그때 갑자기 노래가사 그대로 new dawn!(새로운 새벽), new day!(새로운 날)에 대한 욕망이 솟구쳤다. 그러곤 곧이어 '여기 살아보면 어떨까' 란 생각이 날갯짓을 했다. 방문자에서 돌연 전입자로 변모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난 여태 왜 여기에 살아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본 걸까. 해외는 가끔 나가면서 수도 서울에 대한 로망은 한 번도 꿈꿔보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아파트는 몰라도 오피스텔 하나쯤은.......


사실 이런 상념이 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Perpect Days)에서 기인한 것을 알았다. 참 볼 것 없는 넷플릭스에서 오랜만에 찾아낸 참 괜찮은 수작이었는데, 작품 속 '히라야마'는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인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사람이다. 적게 벌지만 그 벌이에 꼭 맞는 정형화된 루틴을 소유하고 있다. 봐도 얼마 안 될 수입에서 최소한의 '입고 먹고'를 제하고 히라야마는 '윌리엄 포크너'를 읽고, '루리드'의 음악을 듣는다. 오래된 카메라에 직접 필름을 담아 넣고 나뭇잎이 흔들리는 '코모레비'의 순간을 담는다. H는 그런 주인공이 어여뻤다. 그것이 취향이건, 개인의 고집이건, 세태의 부적응이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고요하게 흐르는 그의 규칙적인 삶의 리듬이 마음을 끌었다. 어느 수필 속 걸인의 찬, 황후의 밥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일상은 고독하고 애잔하며 동시에 고매해 보였다. 영화의 마지막에 롱테이크로 딴 '히라야마'의 표정, 마치 이병헌의 '악마를 보았다'의 엔딩 장면이 오마주 되는 듯한 '아큐쇼 코지'의 표정 연기는 그런 복합적 정서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줬다. 저런 정서는 문득 이런 도시에서나 가능하다란 생각이 들었다. 난생처음으로 차갑고 낯선 도시의 감성이 그리워졌다. 난 그런 건 못 겪어 봤으니까. 죽기 전에 그런 삶도 꼭 경험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상처가 있다. 학창 시절과 군대시절의 인연을 다 이 도시에서 떠나보냈다. 김밥 한 줄과 바나나 우유 하나를 봉지에 넣고 고속버스에 오르면서 이 도시완 영원히 작별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지금 당장은 그럴 생각이 없지만 은퇴 이후라면 다시 한번 이 도시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소소하나마 도시의 임금을 받으며 지하상가 간이식당에서 끼니를 때우고, 가끔 작은 바에서 위스키를 홀짝 거리는 상상을 해봤다. 빨래방에 이불을 넣고 탁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는 것도 상상해 봤다. 북악산 아래 고즈넉한 길상사나 그 근처의 문학관, 그리고 작은 찻집들도 분위기가 좋다던데. 종로의 오랜 골목과 사적, 그리고 신촌의 여러 대학 중엔 H의 발길이 한 번도 가 닿지 못한 곳들이 널렸다. 국토균형발전을 위해 주소지를 옮기진 않겠지만 한 5~6년쯤 4도 3촌 하며 이 도시에 몸을 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 시부야의 '히라야마'처럼. 이래서 영화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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