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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랍비 Sep 02. 2024

어쩌다 장발

그다지 어울리진 않지만...

‘실행기능(Executive function)’이라는 말이 있다.

이 실행기능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달성하기 위한 적절한 방법과 시간을 찾아 행동에 적용하는 것을 말한다.

더욱 쉽게 말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실천하며, 진행 상황마다 부딪히는 장애물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 등을 실행기능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초인지’, ‘인지조절’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실행기능이라는 단어는 비서학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하는데, 특수교육학에서는 자폐성 장애 아동이 새로운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징후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한다.


실행기능에는 ‘억제적 통제’‘인지적 유연성’, ‘작업 기억’으로 나뉠 수 있다.


‘억제적 통제’란 자기의 계획과 상관없는 일을 무시하는 능력이다.

매우 쉽고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일에 대한 집중력과 같다.


그리고 ‘인지적 유연성’은 문제 해결에 있어 상황이 자기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이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돌발 상황에도 계획을 유연하게 수정하여 잘 대처한다.


마지막 ‘작업 기억’은 작업 수행에 필요한 기억력이라고 보면 된다.

이중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동은 ‘인지적 유연성’에 어려움이 있어 계획이나 일정이 바뀌거나 환경이 바뀌는 걸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 아이들은 일정한 시간표를 제시해 주고 적절한 패턴과 루틴을 지켜야 마음에 안정을 얻는다.

이런 것은 비단 자폐성 장애 아동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나 또한 그럴 때가 많다.

사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사람뿐 아니라 비장애인들 중 몇몇 중 계획이 바뀌는 걸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 있다.

그 계획이 여행 계획일 수도 있겠고, 어떤 이에게는 운동 계획 등 다양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생활 루틴이 바뀌는 걸 조금 꺼리는데, 그건 모두 다 임용시험을 준비할 때 생긴 습관 때문이다.

  



T와 J 교수님에게 속아 지방의 특수교육지원센터에서 2년을 근무한 후, 나는 임용시험을 치르고 정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정교사가 기간제 교사보다 훨씬 괜찮아서가 아니다.

솔직히 지금에 와서야 별 차이는 못 느끼겠는데, 그때의 이유는 그냥 시기마다 면접 보기가 귀찮아서다.

정교사는 한 번의 임용이면 끝인데, 기간제 교사는 계약기간이 끝나면 다른 곳에 면접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인력풀이 워낙에 잘 형성되어 있고 지방으로 갈수록 특수교사는 부족하기에 면접에 대한 부담은 적다만, 그때의 나는 그냥 임용시험을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지방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는 본가에 들어가 당당하게 말했다.


“어머니. 저는 임용시험을 보겠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살면서 본 표정 중 가장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네가?”


뭐, 내가 워낙 공부를 싫어하던 아들이긴 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이후 전교생 약 400명 중 100등 안에 들어본 적이 없어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큰 결심으로 돌아가 공부하겠다고 선언하는 아들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뭐, 네가?’이다.

심지어 그렇게 노골적으로 놀란 표정을 하다니….

아마 복권에 당첨되었어도 그보단 놀라지 않을 어머니다.

이에 나는 당당히 합격하여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내가 공부하는 모든 책에 나의 다짐을 적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은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할 거라고 말한 일을 해내는 일이다


하지만 일주일이 가지 않았다.

역시나 나는 몹쓸 놈이었고 실패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계획도 없이 무작정 한국사 시험 준비와 인터넷 강의를 병행하니, 한국사 시험은 계속 늦어져만 갔고 인터넷 강의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도대체 왜 그런지 잔뜩 고민하며 그 이유를 찾았다.

명백한 나의 정보력 부족이었다.

나는 별로 알아보지도 않고 한국사 시험 책은 한국사능력 검정 시험이 아닌 공무원 한국사 책으로 공부했으며, 듣지 않아도 될 일반 초등교사의 교과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한 달 만에 모두 다 때려치우고 차근차근히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후기를 엄청나게 찾아봤으며 주위의 임용 시험을 준비한단 친구에게 전화하며 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매일 6시 30분에 일어나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그렇게 도서관에 가서 공부할 때, 트레이닝 복같이 편한 복장은 절대 안 된다.

청바지나 면바지에 니트나 코트를 걸치고 도서관에 정자세로 앉아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잠이 안 왔다.


그리고 항상 9시 너머로 집에 돌아왔다.

가장 변한 것은 년, 월, 일주일 단위의 계획표였다.

끝내야 할 과목과 양이 있었으며, 채워야 할 시간까지 정했다.

그 양과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극도의 짜증과 불안이 몰려왔다.

또한 먹는 것은 닭가슴살과 찐 단호박, 방울토마토 등으로 소식했다.

많이 먹어서 졸린 것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면 운동장에 나가 약 50분 정도 뛰고 나머지 30분 정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그렇게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쌓여 공부하다가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았다.


이러다 보니 나는 내 공부 일과를 줄여 머리를 자르러 가는 일이 크나큰 부담이었다.

때문에 머리를 잘 자르지 않았다.

3개월에서 4개월에 한 번씩 정말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미용실에 갔다.

그럴 수 있던 이유는 머릿결이 곱슬인 탓에 그냥 대충 넘기면 파마라도 한 것처럼 곱슬거려서 덜 지저분해 보였기도 했고, 마침 그때 드라마 ‘도깨비’의 흥행으로 포마드 머리가 유행이었다.


고마워요, 공유 씨. 아, 내가 공유를 닮은 건 아니다. 오해는 금물.


그저 드라마로 유행한 포마드 스타일인 것처럼 위장하고 다닐 수 있었다는 말이다.

아무튼 그 결과 나는 2년 만에 임용에 합격하여 교직 생활을 이어갔고, 아직도 건강하게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임용 기간의 부작용으로 나는 내 생활 루틴 시간을 쪼개 머리를 자르러 가는 걸 굉장히 귀찮게 여겼다.

귀찮은 정도가 아니다.

'실행기능'의 결핍으로 인해 살짝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오른다.


지금도 내가 운동하는 시간이나 집안일하는 시간, 혹은 여가 시간을 쪼개 머리를 다듬어야 한다면 그보다 내 머리가 혐오스러울 수 없다.

그래도 임용시험 보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이는 결과가 좋아서가 아니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걸 증명해서도 아니다.

그저 2년 간 나 자신에 대해 온전히 알아가며 인간으로 한층 더 성숙한 사람이 되었고, 특수교사로서의 전문성을 기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머리 자르러 가는 건 정말정말 귀찮고 짜증이 난다.


‘젠장, 도대체 머리는 왜 계속 자라나는 거야?’


하지만 마저 욕할 수도 없다.

내 머리는 소중하니까.

세상에나, 나이를 먹어가니 머리가 점점 없어진다.

아마 탈모 치료제를 발명할 사람은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이후 진정한 인류의 구원자가 되는 것 아닐까?

아무튼 어쩌다 보니 나는 장발이 되어가고 있다.

아내가 짧은 머리를 선호하니, 나라도 기르자는 심보인지.

그래도 멀찍이 보기에 나쁘지 않아 그냥 방치 중이다.

설마 나만 괜찮게 생각하고 있나?

*윌리스 하빌랜드 캐리어: 에어컨의 기초가 되는 대형 냉장창고 시스템의 발명가


아무튼. 어쩌다 장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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