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풀 가운데 ‘쪽’은 푸른 물감을 만들 때 씁니다. 그래서 푸른 가을 하늘을 쪽빛 하늘이라고 합니다. 서양 꽃 가운데에도 푸른 물감을 만들 때 사용하는 꽃이 있습니다. 국화과에 속하는데 꽃의 모양이 마치 수레바퀴처럼 생겨서 수레국화라고 부릅니다. 원래 유럽 원산의 수입 원예종 꽃으로 요즈음 주변에 있는 공원에 집단으로 파종하여 꽃을 피워 파란색 꽃물결로 관람객을 유혹하기도 합니다. 꽃에 국화라는 이름이 들어 있지만 보통 여름에 많이 핍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원형백과 우리꽃 문화의 디지털 형상화 사업(2010)에 의하면 독일의 국화(나라꽃)라고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독일인들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와 다른 인식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예전에 동유럽에서 사랑을 표현할 때 수레국화를 장식한 옷을 입거나 단추에 끼워 넣는 풍습이 있어 에스토니아의 경우 이 꽃을 나라꽃으로 정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독일의 경우는 19세기 말 황제의 의전행사 때 마차의 장식용으로 푸른색 수레국화를 사용했다고 해서 프러시아(프로이센)의 상징적인 꽃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런 까닭으로 독일의 국화가 수레국화라는 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는 독일의 국화라고 공표한 적이 없으니 다만 상징적인 꽃으로만 남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던 잡초에서 황제의 꽃으로 격상된 이 꽃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꽃을 보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수레바퀴’입니다. 서양에서 수레바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역시 ‘독일’이나 ‘전차’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일의 축구 국가대표팀을 ‘전차군단’이라고 부르니까요. 그러나 제겐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뚜렷이 떠오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 장면입니다.
영화 <벤허> 포스터
제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라고 기억합니다. 학교에서 <벤허>를 단체 관람하러 시내 중심가에 있는 큰 극장에 갔습니다. 당시에는 극장들의 스크린 규모가 커서 요즘 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영화는 상영시간이 3시간 40분 정도나 되어 음악회의 인터미션처럼 중간에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휴식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크나큰 감동의 항아리를 가슴에 안고 왔습니다. 특히 전차 경주 장면과 영화 전체에 흐르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제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제가 본 영화 중에서 단연 최고의 걸작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50여 년간 보아 온 영화 가운데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로 자신 있게 뽑습니다.
“신이시여, 이 영화를 정녕 제가 만들었단 말입니까?”
윌리엄 와일러 감독
<벤허>를 만든 유명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말입니다. 영화 <벤허>는 1953년 로마의 휴일로 세계적인 명장의 반열에 오른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제작 기간만 해도 무려 10년,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1,500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쏟아부어 만든 대작으로 1959년 상영되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세계영화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960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촬영상, 음악상, 미술상, 의상디자인상, 음향상, 편집상, 특수효과상 들 11개 부문을 석권해 종전까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갖고 있던 10개 부문 수상 기록을 깨뜨렸고, 훗날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수상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과 함께 최다 부문 수상 기록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격렬한 해상 전투와 15분간에 걸쳐 숨 막히게 지켜봐야 했던 박진감 넘치는 전차 경주 장면은 세계영화사에서 빛나는 명장면으로 꼽습니다. 주인공 유다 벤허와 로마의 호민관이 되어 배신한 옛 친구 메살라와의 전차 경주에서 감독은 유다 벤허에게는 네 마리의 흰 말이 전차를 끌게 하고 메살라에게는 검은색 말 네 마리가 전차를 끌도록 합니다. 악의 상징인 흑과 선의 상징인 백의 싸움으로 만들어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공식을 만듭니다.
<벤허> 전차 경주 장면
요즘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 효과로 엄청나고 비현실적인 장면도 만들어 내고 있지만, 벤허를 만들던 1959년에는 그런 기술이나 효과가 없었을 때이기에 전부 수작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원형 극장에 가득 찬 군중은 모두 동원된 단역배우이고, 세트도 2년 동안에 걸쳐 만들었다고 합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전차 경주 장면을 만들기 위해 2,500마리의 말과 200마리의 낙타가 동원되었다고 하니 그 엄청난 물량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줄거리는 많이 아시다시피 대충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로마의 폭정과 친구의 배신으로 유대의 귀족에서 죄수로, 죄수에서 노예로 팔려가고, 노예에서 뜻하지 않게 다시 귀족으로 신분이 뒤바뀌며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한 유대 청년의 복수에 얽힌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영화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함께하면서 친구의 우정과 배신, 그에 따른 증오와 복수, 친구의 죽음과 예수의 말씀에 따른 화해와 용서, 더 나아가 사랑과 구원이라는 깊고 신실한 종교적 주제를 장대한 스케일로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저는 수레국화에서 전차의 바퀴를 떠올렸고, 영화 벤허의 전차 경주를 떠올렸습니다. 작은 꽃 하나도 그냥 피어 있는 것은 없습니다. 작은 연약한 꽃이지만 풍부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화해와 용서가 필요하고, 사랑과 구원을 향한 몸짓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