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굴은 담(벽)이 있어야 제 이름값을 합니다. 엄청나게 많은 잎을 달고 흡반과 같은 뿌리는 벽에 내리고 아무리 거센 바람이 와도 끄떡하지 않고 벽을 타고 꼭대기를 넘습니다. 사진은 우리 동네 아파트에 조경으로 한옥 담을 쌓고 담쟁이가 자란 것과 27층 아파트 벽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입니다. 몇 년이 더 지나면 과연 저 27층 아파트 귀퉁이 벽면을 가득 채울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식물도감을 찾아보면 담쟁이덩굴은 덩굴식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칡이나 등나무 혹은 환삼덩굴과 같은 다른 덩굴식물처럼 다른 것을 감고 올라가는 형태가 아니라, 다만 벽이나 바위를 타고 오르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웃하는 식물을 칭칭 감아 죽이거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식물이 아닙니다. 흔히 덩굴손이라고 부르는 흡반(吸盤, sticky pad)과 같은 구조로 개구리 발가락의 흡반처럼 생겼기 때문에 다른 물체에 쉽게 달라붙을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해하기 쉬운데 담쟁이덩굴은 풀이 아니라 나무입니다.
담쟁이당굴꽃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도종환, <담쟁이> 전문
담쟁이덩굴의 이미지를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는 시 한 편을 찾아보았습니다. 시인은 시 속에서 담쟁이 이미지의 중심에는 ‘벽’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저 벽면을 다 채운 초록색의 잎들은 수많은 절망일까요? 시인 도종환은 벽을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벽을 덮는 것을 절망을 덮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리의 절망을 과연 담쟁이덩굴은 잡아 줄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벽’, ‘절망의 벽’, ‘넘을 수 없는 벽’입니다. 그 벽의 실체는 절망입니다. 제 담쟁이덩굴 사진에서와 같이 절망을 푸르게 가득 덮습니다. 수없이 많은 잎으로 그 절망을 덮고 벽을 넘는 담쟁이덩굴을 통해 절망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오 헨리, <마지막 잎새>(구글 이미지)
눈을 돌려 담쟁이덩굴이 주요한 역할을 하는 서양 소설 하나를 찾아봅시다. 너무나 익히 알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어렸을 적 배운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떠올리셨을 줄 압니다. ‘마지막 잎새’는 오 헨리의 가장 잘 알려진, 가장 감동적인 단편소설입니다. 고통 속에 절망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고귀한 사랑과 인간의 아름다운 마음을 이렇게 잘 담아낸 작품도 드물지요.
이 작품에 나오는 마지막 잎새는 담쟁이덩굴이 어울리겠지요. 미국 담쟁이덩굴은 우리 담쟁이덩굴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 담쟁이는 잎이 한 개의 큰 덩이에서 약간 세 갈래로 갈라진 듯이 보이지만 미국 담쟁이덩굴 잎은 다섯 갈래로 완전히 갈라져 있습니다. 그리고 꽃도 우리 담쟁이덩굴은 잘 짜여 있고 여릿여릿하고 세밀한 데 비하여 미국 담쟁이덩굴은 어딘지 어수선하고 꽃술이 두툼합니다.
미국담쟁이덩굴(왼쪽)과 담쟁이덩굴(오른쪽)
다시 <마지막 잎새>로 돌아가 봅시다. 가난하고 젊은 여성화가 수와 존시는 함께 어려움 속에서도 예술에 매진합니다. 그러나 주인공 존시는 당시 의술로서는 고치기 힘든 병인 폐렴에 걸려 삶의 의욕을 잃고 죽기만을 기다립니다. 수는 어떻게 해서든 존시에게 삶의 의욕을 다시 불러일으키려 노력해도 존시는 날로 허물어지고 맙니다. 침대에 누워 창밖의 잎새가 떨어지는 것을 하나하나 세면서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삶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었습니다. 수가 이런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건물에 사는 가난하고 늙은 화가였던 베어먼밖에 없었지요.
밤새 진눈깨비가 세차게 내린 어느 날 아침, 수와 존시는 어젯밤 거센 눈바람에 잎새가 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힘없이 창밖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지 않고 담벼락을 꽉 움켜쥐고 남아있었습니다. 그다음 날도 잎새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를 오래 바라보던 존시는 죽기만을 기다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삶의 의지를 되찾은 그녀는 빨리 병에서 나아 자신이 원했던 나폴리의 바다를 그리겠노라고 의지를 담은 소망을 말합니다. 존시를 찾아온 의사는 수에게 존시가 이제 죽음의 고비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말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 혹독하게 추웠던 날 급성 폐렴에 걸린 나이 든 환자는 생명을 건지기 어려울 것이라 말합니다. 그 환자는 다름 아닌 같은 건물에 사는 늙은 화가 베어먼이었습니다. 수의 부탁을 받은 베어먼이 눈보라 속에서 존시를 위해 그린 담쟁이덩굴 잎새였습니다.
미국담쟁이덩굴꽃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삶의 의지를 갖게 해 준 매개체이자 희망의 결정체인 담쟁이덩굴, 한 사람의 생명이 또 다른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부활하는 순간이란 아이러니한 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희망이 사라진다면 병이라는 고통 속에 육체와 영혼은 영영 사라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의 희망을 놓지 않는 단단한 매개체가 오늘의 제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불치의 병으로 말미암은 온종일의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거의 희망을 잃어가는 제게 새로운 빛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잎새는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