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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Oct 07. 2022

흰말채나무

폭풍우 치는 언덕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주는 꽃

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남쪽에서 들려오는 복수초, 동백꽃은 이미 지난 지 오래고 매화꽃을 넘어 벚꽃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봄을 잡으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파트 정원을 기웃거리고 있던 차에 이게 웬일입니까?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홀딱 젖었습니다. 집에 와서 씻고 뉴스를 보니 다른 지방에서는 눈이 왔다고 합니다. 눈치 빠른 진사님(사진을 찍는 사람들)들은 자기가 잘 아는 산에 올라 상고대 사진을 찍어 올리기도 했군요. 춘삼월 마지막 날에 눈과 폭풍우라니요? 폭풍우는 너무 과했나요? 슬쩍 찬바람에 스쳐도 아픈 제 얼굴에는 폭풍우 이상입니다. 정녕 꽃샘추위가 닥쳐올 줄 몰랐습니다.  

        


고층에 사는 우리 집 창을 거세게 두드리는 폭풍우 치는 밖을 생각하며 제가 어느 소설 속에 빠져 헤매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황량한 영국의 요크셔 언덕의 거센 바람 속으로 빠져들어 온몸으로 맞으며 두 연인이 나누었던 숨겨진 사랑의 보금자리에서 사랑의 밀어(密語)를 듣고 있었습니다. 아 눈치채셨나요? 그렇습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이야기입니다. 에밀리 브론테는 <폭풍의 언덕> 단 한 작품만을 남기고 30세에 요절하고 말았지요. <폭풍의 언덕>은 주인공인 캐서린과 히스클리프 두 연인 사이에서 진실이 감춰지고 잘못된 판단으로 인한 복수로 비극적인 사랑의 종말을 맞이한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영문판


주 무대인 ‘위더링 하이츠’의 주인인 캐서린의 아버지 언쇼는 리버풀에 가는데 캐서린은 말채찍을 사달라고 부탁합니다. 이것이 비극의 실마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며칠 뒤 말채찍 대신 고아를 데리고 옵니다. 언쇼에게는 아들을 잃은 아픈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죽은 아들의 이름과 같은 히스클리프라는 이름을 고아에게 붙여줍니다. 아버지 언쇼가 양아들인 히스클리프에게 사랑을 쏟자 친아들인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합니다. 얼마 후 언쇼 부부는 죽게 됩니다. 친아들인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머슴으로 부리며 학대합니다. 오빠인 힌들리와 달리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사랑에 빠집니다. 배경이 된 요크셔의 황량한 언덕에서 숨겨진 자신들의 사랑의 장소에서 사랑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캐서린은 파티에 온 잘생긴 청년 에드거 린튼의 청혼을 받고 그와 결혼하게 됩니다. 히스클리프는 변심한 캐서린을 원망하며 집을 떠나 미국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캐서린은 린튼가와 결혼하면 사랑하는 히스클리프를 오빠인 힌들리의 억압에서 구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에드거의 청혼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녀의 진심은 히스클리프에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히스클리프가 떠나고 그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 지친 캐서린은 결국 마음에도 없는 에드거와 결혼하고 맙니다. 미국에서 오직 복수만을 생각하며 큰돈을 번 히스클리프는 요크셔로 돌아와 힌들리와 캐서린에게 복수를 시작합니다. 도박을 통해 힌들리의 전 재산을 빼앗습니다. 캐서린의 남편인 에드거의 여동생인 이사벨라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과 현실의 부조리에 괴로워하는 캐서린은 병들어 죽음을 앞두게 됩니다. 뒤늦게 그녀를 찾아온 히스클리프에게 키스합니다. 히스클리프는 그제에서야 캐서린의 진심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캐서린은 자신을 떠난 히스클리프를 원망하며 죽어갑니다. 히스클리프는 절규합니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나를 찾아와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윌리럼와일러 감독의 영화 <폭풍의 언덕> 한 장면


내 허리를 휘감아줄 

사내는 없는가      

저 야생의 히스크리프처럼 털이 세고 

하나밖에 다른 것은 모르는 밤의      

다시는 용납할 수 없는 

아픔의 땅 위를 뒹굴고 있다      

붉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으르렁거리는      

목 아프도록 징그러운 

그리움이여      

먼 바람 속에서 

무덤이 나를 삼키려 

달겨든다      

죽은 에미의 

밥상에서는 그릇이 저 혼자 깨지고      

수천 번 쏟아지는 

서슬 푸른 기침을 따라      

밤새 비단벌레 같은 여자가 

하늘로 하늘로 오르고 있다      

 - 문정희, <폭풍우> 전문    

      

영화 <폭풍의 언덕>


문정희의 <폭풍우>라는 시입니다. 아마도 이 시의 바탕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제목도 ‘폭풍우’고 <폭풍의 언덕>의 남자주인공 히스클리프가 시어로 등장하는 것이 그 근거일 것 같네요. 이 시는 ‘목 아프도록 징그러운’ 그리움이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은 ‘야생’의 히스크리프입니다. 시인이 ‘야생’을 강조한 것은 아마도 문명에 의해 파괴되어가는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열정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시는 사랑과 복수의 화신이 되었던 히스클리프를 통하여 비문명적이고 원초적인 생명력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존 질서가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편견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에 있어서 ‘히스크리프’는 <폭풍의 언덕>에서 보여주었던 야생의 지독한 사랑의 주인공입니다.  

              


다시 <폭풍의 언덕>으로 돌아갑니다.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비극적 사랑이 시작되게 된 요인 지점에서 캐서린이 아버지에게 사다 달라고 한 ‘말채찍’이 등장합니다. 아버지는 캐서린이 사라 달라고 한 말채찍 대신 히스클리프를 데려오게 되고 거기서부터 모든 것들이 시작됩니다. 캐서린 요구한 대로 아버지가 말채찍만 사 오고 히스클리프를 데려오지 않았더라면 모든 애증은 없었겠지요. 

    

폭풍의 언덕에 두 사람의 인연 시작 지점에서 등장하는 말채찍을 만드는 나무가 우리 동네 공원에 많이 심겨 있습니다. ‘흰말채나무’라는 관목입니다. 대개 키는 2~3m 정도로 울타리나 경계를 세울 때 참 보기에 좋은 나무입니다. 흰색 작은 꽃들이 다닥다닥 뭉쳐서 우산 모양으로 핍니다. 요즈음 어린아이들은 낙하산 모양이라고 하네요. 그럴듯합니다. 그런데 바로 흰말채나무 꽃말이 ‘위로’와 ‘당신을 보호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합니다.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클리프는 사랑하는 연인 캐서린을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말채찍을 사 오지 않아서 보호해주지 못한 건 아닌지, 그걸 위로라도 해 줘야 할까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아픈 사랑의 시작점이 된 것이 ‘말채찍’이기 때문에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해봅니다.  

             

흰말채나무 열매(왼쪽)와 겨울 모습(오른쪽)


흰말채나무의 다른 이름이 홍서목(紅瑞木)입니다. 잎이 다 지고 난 겨울에는 붉은 줄기가 유난히 돋보입니다. 겨울에 공원을 산책하다 빨간 줄기들이 뭉쳐있는 관목 더미를 보시면 ‘아, 저게 흰말채나무구나.’ 여기시면 됩니다. 이 나무는 겉은 빨간데 속이 하얗고 탄성이 좋아 예전 말 타고 다니던 시절에 말채찍으로 썼다고 합니다. 흰말채나무 열매는 하얀 보석처럼 아름답습니다. 언뜻 보면 진주알 같기도 합니다.  

                   

김천에 있는 이약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하노서원(왼쪽)과 제주에 있는 이약동 한라기적비(오른쪽


말채찍과 관련하여 유명한 조선조 청백리(淸白吏) 이약동(李約東 ; 1416~1493)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1470년에 제주 목사로 임명되어 제주 백성들의 공물과 세금이 과도하여 원성이 많은 것을 보고 공물의 수량을 줄이고 세금도 줄여주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합니다. 그는 제주 목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입었던 관복과 모든 물품을 관아에 다 두고 떠났습니다. 한참 말을 타고 가다 보니 손에 관아의 물품인 말채찍이 들려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성문 누각에 말채찍을 걸어놓고 떠났습니다. 후임으로 온 목사는 그 뜻을 기려 말채찍을 성문에 그대로 걸어놓게 하였고, 나중에는 백성들이 채찍 모양을 바위에 새겨 그 바위를 채찍을 걸어놓은 바위라 하여 ‘괘편압(掛鞭岩)’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배를 타고 육지로 향하던 중 갑자기 거센 파도가 일어 배가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는 제주에 와서 내 개인의 욕심으로 재물을 취한 적이 없다. 혹시 내 부하 중에 누군가 부정한 짓을 한 사람은 없는가? 행여 섬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내놓아라.” 하니 한 군졸이 갑옷 한 벌을 꺼내놓으며 제주 백성들이 정성을 다하여 목사님의 갑옷 한 벌을 지어 전해주라고 했다면서 내어놓았다. 이약동은 정성은 받았으니 갑옷은 바다에 던지라 하였다. 그러자 바로 바다가 잔잔해졌다고 합니다. 이후로도 이약동은 청렴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 죽었다고 합니다. 나라의 재물인 말채찍 하나라도 가져가선 안 된다고 도로 걸어놓고 임지를 떠나던 그의 모습에서 요즈음 우리 공직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저는 흰말채나무의 꽃말은 ‘당신을 보호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흰말채나무의 꽃말이 너무 좋고, 감사하고, 제 고통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지나가다 발길을 돌려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제게 많은 위로와 위안을 줄 것이라 믿습니다. 각박하고 힘들고 외로운 삶에 지쳐서 쓰러질 때, 내 상처와 고통을 덜어 몸과 마음에 위로와 위안을 주는 꽃입니다. 때로는 부닥치고 때로는 서로를 보듬어주고 하는 모든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 것을 알게 해주는 꽃입니다. 폭풍우 치는 언덕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주는 꽃이 흰말채나무꽃입니다. 혹여라도 담장에 어떤 나무를 심어야 할지 고민이라면 흰말채나무를 심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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