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글방 2월 10일차]

엄니

by 공감녀

★ 10일차 글감 (2.12 / 목)

[글감]

“설을 앞두고 문득 떠오른 가족 혹은 관계에 대한 감정은 무엇인가?”



엄니


엄니(시어머님) 얘기를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설 명절 하면 압도적으로 엄니의 기억이 모든 걸 덮는다. 그 작은 체구에, 독기 품은 마음조차 홀로 연약하기만 한 맏며느리. 울타리가 되어줄 남편도 없이, 장손 아들 앞에선 시댁 식구 험담도 한번 하지 않으셨다. 같은 며느리 처지라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나에게 모든 설움을 꺼내고 또 꺼내며 위안이 되셨을까. 매년 만두를 빚으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친지들이 맛있게 드시는 모습에 힘겨움이 다 보상되셨을까. 가진 게 없어서 더 사이가 좋고, 고향 시골의 순박함을 간직한 채 전국 도회지에 나가 살림을 사는 시동생네들에게 엄니는 고향 같은 분이었을까.

장자 없는 집의 장손이라고 남편을 동급 취급해 주는 작은아버님들 덕에 남편은 집안의 어른처럼 책임감을 가지고 좋은 분위기를 잘 만들어냈다. 하지만 시집올 때부터 가부장 문화가 단단한 분위기에서 엄니는 대접받지 못했다. 남편은 억울하다 할지 몰라도 같은 며느리의 눈에는 분명 그리 보였다. 없는 집안이었지만 자존심과 예의범절은 중요했다. 그 모두를 맞추고 살아온 당시 부모님들의 삶이 특별하거나 낯설지는 않다.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시집살이와 어려운 남편, 그 밑에서 집안 대소사는 기본에 장사로 생계까지 책임지다 홀로 아들 둘을 키워온 고충은 얼핏 생각으로도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더 대접받아야 했다. 더 존중받고 더 귀함을 받아야 마땅했다. 누구를 탓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에 복받치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지, 남편을 향한 것인지, 얄미운 고모님, 시할머니를 향한 것인지, 일찍 떠나신 시아버님을 향한 것인지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억울하다. 엄니의 삶 한구석이 서글프다. 비참하게 보내드린 마지막 모습 때문에 나는 나를 더 많이 책망하고 아파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자꾸 잊는다.

설을 앞두고 엄니가 좋아하시는 김치만두를 택배로 주문해서 받았다. 편하고 좋다. 엄니보다 더 건강하고 젊은 할머니들이 만든 만두다. 나도 너무 좋아하는 김치 만둣국을 엄니랑 많이도 끓여 먹었다는 생각이 어스름하게 떠오른다. 잊고 있었는데 다시 떠올리니 참 좋다. 나는 엄니처럼 손수 만두를 빚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산다. 누구든 나를 우습게 여기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마음도 먹는다. 나는 박 씨 집안의 종도 아니고 박 씨 집안의 화목이 내 손에 달렸다는 달콤한 말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내가 억울한 것은 엄니의 억울함을 더 많이 들어드리지 못한 것. 말년에 엄니를 더 많이 참아드리지 못한 것 그뿐이다.


달력에 빨간색 숫자 네 개가 나란한 것을 다시 찬찬히 드려다 본다. 그리고 엄니를 다시, 새로운 시각에서 떠올리게 되어서 감사하다.

작가의 이전글[단단글방 2월 9일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