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삑삑삑' 반갑지만 안 반가운 현관문 소리
나의 결혼은 주변인들에 비해 조금 이른 편이었다. 나는 스물일곱이 막 되었고 남편은 서른이 된 봄에 결혼을 했다. 우리의 신혼집은 시가와 시누이 집과 층만 다른, 같은 아파트 같은 동이었다. 시부모님께서는 참견과 간섭을 일절 하지 않으셨고 시부모님의 소식은 남편을 통해 가끔 듣는 안부뿐이었다. 아무리 철없는 며느리라도 이래도 되나 싶어 한 달에 한두 번 퇴근길에 시가에 들러 저녁 한 끼 먹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의 신혼집으로 가곤 했다. 시어머님께서는 그것도 불편하다시며 일하고 와서 피곤할 텐데 굳이 자기 집에 들러 인사치레 할 필요 없으니 차라리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쉬라고 맞벌이 신혼부부 아들내외에 대한 배려를 수준 높게 하셨다.
시부모님께서는 집안의 소사를 논할 때 나이 어린 며느리가 무엇을 알겠나 싶어 남편과 상의해 모든 것을 처리하셨고 나도 딱히 시가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도 애매하고 중요하다 싶은 내용은 남편을 통해 듣고 의견을 전달하며 살았으니 불편함은 없었다.
결혼 후 일 년 만에 아이를 가졌다. 첫째는 태어나면서부터 등센서를 달고나와 순한 기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예민의 끝판왕이었다. 당시 친정엄마는 수술 후 회복치료 중이셨고 시어머님께서는 내 아이와 18개월 차이 나는 손위 시누이의 아이를 전적으로 맡으셨기에 나는 양가 어른들께 육아의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육아의 책임은 당연히 부모에게 있으니 양가 부모님께 받지 못하는 도움에 대해 서운해 말자' 생각했다. 나는 산후조리원을 나오자마자 헬육아를 맞이했고 하루종일 내 등에 매달려 빽빽 우는 아기의 울음소리보다 차라리 출근해서 사무실에서 맞이하는 민원처리가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나는 신혼 때부터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를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층만 다른 시가와 또 다른 층에 사는 시누네와 공유했다. 이건 시가와 시누네도 마찬가지였다. 시어머님이나 형님이 맛있는 요리를 하면 우리 집에 들어와 놓고 가셨고 나도 그랬다. 우리는 그동안 불편함 없이 잘 살아왔기에 남들이 이 사실을 알며 경악할 때마다 웃어넘겼다.
"삑 삑 삑 삑 띠리링"
친손주가 보고 싶을 때마다 시어머님은 딸의 출근 시작 시간부터 퇴근 시간까지 양육을 도맡은 조카(시누 아이)와 한 몸으로 우리집에 들어오셨다. 비록 현관문 키번호 누르는 소리에 겨우 재운 내 아이의 낮잠이 깬다 해도 친손주 보고 싶은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했다. 낮잠을 못다 잔 아이의 잠투정이 새벽까지 이어져도 어쩔 수 없지 싶었다. 육아휴직을 내긴 했지만 아이 하나에 절절매는 아내 때문에 남편까지 발이 꽁꽁 묶인 나날이 지속됐다. 다행스럽게도 외국계 회사를 다니는 남편은 항상 칼퇴를 했고 집에 오자마자 샤워하고 아이를 둘러맨 채 저녁을 먹었다. 남편이 퇴근을 해야 내 가슴과 등에 번갈아 매달려 있던 아이가 떨어져 나갔으니 남편이 현관문 키버튼을 누르는 시간이 하루 중에 제일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조금 크면서 나의 육아휴직은 끝이 났고 평일에는 출근이 이른 나 대신 남편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했다. 주말엔 친정에 들러 평일에 하지 못한 영양보충과 잠 보충을 실컷 하고 다시 평일을 맞는 일상을 지속했다. 여전히 남편은 자상했고 우리에게 둘째가 찾아왔다.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둘째를 가졌단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여전히 우리에겐 내가 출근한동안 두 아이를 맡길 비빌언덕은 없었고 남편보다 조금 버는 내가 퇴사를 하는 게 우리 가정의 경제상황에 옳은 일이었다. 하지만 억울했다. 복직하며 하고 싶은 것들도 많아 승진을 앞두고 힘든 상황도 버텨냈는데 이제 좀 뛰어보려 하는 내가 그동안의 공부와 경력 다 버리고 다시 육아에 전념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속상했다. 막막했다.
그래도 어째, 아이의 초음파 심장소리를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엔 사직서가 떠올랐고 난 그렇게 아이 둘 엄마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