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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네 Aug 18. 2022

꽃의 의미

  친정집 문을 열면 주방 딸린 방과 사람하나 누울만한 작은 방이 전부였다. 그런데 신발장 위, 텔레비전 서랍장 한켠엔 어김없이 꽃화분이 놓여 있었다. 빛바랜 플라스틱 화분에 고운 모양도 없는 풀들을 좁은방에 두는게 싫었다.


  “화분에서 흙먼지가 얼마나 나올까. 호흡기에 안좋아. 한 두개만 남기고 정리하자.”

  친정집에 들어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엄마에게 잔소리를 했다.

  “여기 봐라. 꽃 폈네. 이쁘지?”

  엄마는 내 불평엔 댓구조차 없고 온통 꽃에 대한 칭찬 뿐이었다.

  “아이고, 또 딴소리 하시네. 딸보다 꽃이 좋나 보네.” 말해 뭣하나 싶어 체념 했다.


  엄마는 갈 때마다 새 화분을 자랑했다. 돈을 주고 사는 게 아니였다. 동네어귀 꽃집에서 죽어가는 꽃을 얻어와서 살리는 재미에 푹 빠지셨다. 한날은 누가 꽃을 다 버렸다며 쓰레기 더미에 있는 화분을 주워 오기도 했다. 이 쯤 되면 꽃에 진심인 듯 하다.

  난 엄마를 닮지 않아서 식물 키우는데 재주가 없었다. 어쩌다 예뻐서 사온 허브며 꽃화분들은 한두달을 넘기지 못했다. 관심은 사온 뒤 몇일 뿐이지 이내 무심했다. 꽃은 그걸 아는지 한달을 못 넘기고 시름시름 앓다 운명을 달리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난 식물하고 안 맞다’였다.     


  결혼하고 엄마도 돌아가시고 친정이라 할 만한 곳이 없어졌다. 그 때문이었을까. 귀촌한 후 꽃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풀데기 뿐인 집마당이 삭막해서 심기 시작한 꽃씨가 하나 둘 늘어났다. 어떻게 키울 까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꽃을 보겠다는 갈망이 있었다. 잊을만하면 싹이나고 자라서 꽃을 맺기까지 아기 돌보듯 지켜봐 줘야 했다. 시골에 와서 답답했던 마음, 엄마를 떠나보낸 무기력함 대신 매일 아침 화단에 앉아 꽃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에게 꽃은 어떤 의미였을까. 먼저 떠난 남편의 빈자리였을까. 무뚝뚝하고 잔소리 많은 딸 보다 나은 사랑스러움이었을까. 병들어 훌쩍 떠나버린 엄마를 생각하면 섭섭하다. 화려하게 피었다 지는 꽃이 아쉽다. 그렇지만 또 꽃을 키운다.

꽃에게 위로를 받는다. 꽃을 보면 내 마음도 예뻐지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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