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깎는다

연필을 깎다 쓰다

by 시린

연필을 깎는다. 전시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다.


전시장이 박물관 내에 있다보니 박물관 방명록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다. 빈 종이만 보면 달려드는 아이들의 ‘ㅇㅇ 왔다 감’, ‘ㅇㅇ아 사랑해’ 습격도 매일 여러 차례. 공책 한 권이 며칠을 못 간다. 붓펜과 네임펜, 연필도 수시로 없어진다. 뭘 쓰고는 그대로 들고 가버리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공책과 포스트잇을 새 걸로 바꾸고 네임펜을 채워두고 연필을 깎는다. 아동 관람 단체는 태풍처럼 지나간다. 한 팀만 지나가도 연필은 죄 부러져 있고 지우개 가루가 소복하다. 연필심을 문질러 생긴 까만 똥이 아니라 그냥 책상에 문대어 떨어져 나간 진짜 지우개 가루다. 아이들은 왜 연필에 지우개가 멀쩡히 붙어있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걸까.


연필을 깎는다. 집에 동전만 한 연필깎기도 있지만 칼을 가지고 다닌다. 종이를 깔고 칼날을 밀어내며 심호흡을 한다. 손떨림이 멎을 때까지 크게, 두 번, 세 번.


긴장하는 거다. 초등학교 1학년, 처음으로 허락을 받고 칼날을 접어 넣는 도루코 칼로 연필을 깎았던 때처럼. 연필과 칼을 잡은 나는 무릎 사이에 끼운 휴지통에 나무오리를 떨어뜨리던 때로 돌아간다. 입구 모서리에 연필을 대고 심을 갈았던, 어리고 서툰 손에 땀이 난다. 아차 하는 순간 손가락을 벨 수 있다.


사십 년 가까이 해오면서도 여전히 연필깎기에 서툴다.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 순간이 처음이고, 첫 연필, 첫 칼날이다.


잘 깎고 싶다. 예쁘게 깎고 싶다. 깎아낸 모양이 모두 같았으면 좋겠다. 나무의 각도와 심의 길이가 일정하고 단정했으면 좋겠다. 심끝은 가늘고 뾰족하되 너무 날카롭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무에도 흑연에도 칼날자국이 도드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직선의 자국이 남는 건 싫다. 칼날을 세워 살살 긁어 직선의 나무날을 간다. 뭉툭하게, 쥐었을 때 손가락에 모서리가 닿지 않도록.


바지에 아무리 문질러도 손바닥은 자꾸만 연필 위에서 미끄러진다. 다시 심호흡을 한다. 손떨림이 멎을 때까지 크게, 두 번, 세 번. 진동이 칼날에 전해지는 순간 심은 부러지고 만다.


조금 더 뾰족하게 갈려다 부러져버린 심끝은 심장에 박힌다. 아프다. 찔린 자국이 남는다. 심장은 검푸른 점 투성이다. 매번 처음처럼 아프다.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욕심의 파편, 통증.


잘 하고 싶다. 예뻤으면 좋겠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 실수하고 싶지 않다. 상처입기 싫다. 그래서 긴장한다. 매 순간이 처음이고, 첫 일, 첫 삶이다. 오십 년 가까이 살아오면서도 여전히 서툴다.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심호흡을 한다. 심장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크게, 두 번, 세 번. 내가 있는 곳, 눈앞에 있는 시간을 본다. 여기, 지금,


연필을 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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