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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Sep 04. 2022

우중산책

빗길 마실하다 쓰다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비 맞는 것쯤, 하며 걸을 때도 있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을 때뿐. 일부러 빗속으로 뛰쳐나가지는 않는다. 태풍이 도착하기 전에 저 비바람 속을 한번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왜 한 건지 알 수 없다.


비옷을 입으면 너무 더울까 봐 일회용 얇은 비닐옷을 입었다. 신발은 물이 잘 빠지고 금세 마르는 아쿠아슈즈. 몇 년 묵은 비닐에서 나는 망측한 냄새는 비바람이 후딱 날려주리라.


냄새만이 아니었다. 십 미터도 못 걸었는데 비는 얇은 비닐에 싸인 머리카락과 옷과 가방을 완벽하게 적셨다. 바람이 손톱을 세워 몇 번 그으니 비옷 아랫자락은 야구장에서 흔들어대는 총채 모양이 되었고.


시원하구나, 시원해. 예상 못한 바는 아니니 즐겁게 여기기로 했다. 이렇게나 금방 너덜너덜해질 줄은 몰랐지만.


거대한 총채가 느릿느릿 걸어다니니 다들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러던가 말던가 신경 안 썼는데 잠시 후 감쪽같이 하늘이 개었다. 바람까지 싹 사라졌으니 기가 찬다. 내 우중산책은 어쩌라는 거야? 이미 다 젖었는데 어떡할 거야. 누구한테 하는 원망인지. 뜻대로 되는 일이란 별로 없는 거다.


이제 사람들은 비도  오는데 해괴한 몰골로 돌아다니는 총채를 대놓고 키들대며 쳐다본다. 쫄딱 젖은 몸에 비닐이  달라붙어 총채의 몸통은 에 싸인 바게트 샌드위치 모양새다. 게다가 덥다. 아무래도  되겠어서 랩을 벗겨버렸다. 젖은 옷으로 다니는  차라리   테지.


빗속을 걷다보면 뭔가 만날 거라 기대했던 것같다. 사는 동안 비바람이 가져다 준 것들이 있었다. 가져간 것도 있었다. 잘 잡히지 않는 그런 상념들을 붙들어 보고 싶었나 보다.


생각하려 했던 생각은 잡히지 않았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과 마주쳤다. 소라만 한 달팽이, 토토로의 먼지 친구들 같은 밤송이들, 처음 가본 빵집. 매일 마실길에서 마주치던 풍경 속의 처음 보는 다른 풍경들.


한두 시간의 산책, 집 근처를 매일 걷는 길에서도 뜻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다. 그건 그것대로 좋지, 시원하구나. 좋아하는 빵을 잔뜩 사들고 돌아왔다. 빵 사러 갔다 왔어? 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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