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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Sep 13. 2022

돼지고기 산적의 충격과 기억

명절음식을 먹다 쓰다

8  이사한 제주  집은 농가주택 밖거리였다. 안거리에는 주인 아주머니와 큰아들,  데려온 외국인 며느리가 살았다. 주인집과   안에 사는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반면  시골집 살이가 걱정이던 차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흔히 상상할 법한 시골 할망이었다. 종일 밭일하느라 바쁘고 조금 무뚝뚝했다. 밖거리에 사는 딸 같은 아이(제주에선 자기보다 어리면 다 아이다.)가 밥은 해 먹는지 늘 걱정을 했다. 밭에서 뭘 가져오면 그냥 부엌으로 들어가는 법이 없었다. 무수 한 뿌리, 간낭 한 통, 세우리 한 줌이라도 주었는데 조심이라는 게 없어서 아무 때나 아무 문이나 불쑥 열고 내밀었다. 내가 없을 땐 식게 퇴물(제사 음식)을 쟁반째로 놓고 가기도 했다. 그 집에 산 4년 동안 문은 안 잠그고 살았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꽤 추운 겨울밤 자정쯤이었다. 노크 소리에 이어 새시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 밖으로 빼꼼 보니 문 안에 쟁반이 놓여 있었다. 식게가 끝나자마자 물려온 듯했다.


냉장고에 넣으려고 문을 열다 마음을 바꿨다. 음식의 온기가 아무래도 아까웠다. 그릇을 넣는 대신 맥주를 꺼내고 젓가락을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캔을 따고 엎어뒀던 책을 다시 들었다. 읽던 문장을 더듬으며 맥주 한 모금, 초무침 한 입, 다음 문장, 다시 맥주 한 모금, 산적고기 한 점- 그 때였다.


물큰하게 입안을 채우는 노린내. 어금니에 박힌 덩어리를 더 씹지도 뱉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목구멍이 후끈하고 얼굴이 확 달았다. 목젖이 혀를 압박하며 탈출하려 해서 밀어넣느라 안간힘을 썼다. 식은땀이 삐질삐질 났다. 간신히, 천신만고 끝에 숨을 참고 빠르게 두어 번 부수어 목구멍 근육으로 끌어당겼다. 입에 한 번 넣은 제사음식을 뱉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뭔지 모를 의무감 같은 게 들어 아닌 밤중에 제대로 용을 썼다.


다시 맥주 한 모금, 아니 벌컥벌컥 두세 모금. 뜨끔거리는 목을 만지며 카스테라를 조금 뜯어 먹었다. 달고 부드러운 게 들어가니 조금 나았다.


논농사를 못 지어 쌀이 귀했던 제주. 육지와는 사뭇 다른 식생활을 해왔던지라 제사상도 다르다. 기름떡, 카스테라를 올린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나 돼지고기 산적을 먹어본 적은 없었다. 산적은 소고기인 줄만 알고 있던 서울촌년이 생각지도 못하게 터진 돼지기름 맛에 식겁했던 거다. 산적이 맛이 없었다거나 돼지고기를 싫어한다는 게 아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맛에 혀가 놀랐을 뿐. 인간의 혀는 우습다.


인간은 우습다. 돼지고기 산적 맛에 익숙해지는 데 4년이 꼬박 걸렸는데, 이제 퇴물을 나눠주는 아주머니가 없으니 그 맛이 아쉽다. 썩 좋아하는 건 아니다. 만들어 먹거나 사 먹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명절이 불러오는 기억 중 한 자락일 뿐. 살면서 무슨무슨 날이 좋았던 적은 별로 없었는데, 나쁘지 않은 기억 하나가 생겼다. 지금은 그걸로 되었다.


*작품 이진경. <   눈은 나리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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