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털 나고 첨으로

머리털 깎고 글쓰기

by 시린

“머리 숱도 많고 너무 예쁜 곱슬이네요.”

내 머리에서 나고 자란 털, 세상에 나와 처음으로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 감개무량도 모자란데, 주인이란 양반은 처음 듣는 칭찬에 대꾸할 말을 잃고 어버버 중이다. 칭찬도 받아봐야 빠르고 바르게 대응할 수 있다. 익숙지 못하면 이 모양이 된다. 심지어 의심도 한다. ‘정말 예쁘다는 말일까?’


“아주 건강한 머리죠.” 이 말은 제법 들어봤다. 예쁘다, 결이 좋다 등의 통상 하는 칭찬이 아닌 건강하다는 표현. 이건 펌이나 탈색 염색 등을 하지 않아 그렇다. 약품을 써서 ‘지지고 볶으면’ 머릿결이 상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점에서 내 머리카락은 건강하다. 하다못해 드라이어 바람도 잘 쐬지 않으니 갈라진 데라곤 없다.


하나 건강하다는 말이 칭찬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다 듣는 말이니 더욱. 머리가 ‘너무’ 건강하네요. 드라이도 잘 안 하신다고요? 이 커트는 세팅을 좀 해주셔야 예뻐요, 나이도 덜 들어 보이고. 앞머리에 새치가 눈에 거슬리진 않으세요? 부분 염색만 좀 해줘도 훨씬 좋을 거예요. 이렇게 진행되기 일쑤다. 이때의 ‘건강하다’는 ‘무관심’이다. 길게 풀면, ‘나이 든 게 자랑도 아니고, 관리 좀 하세요.’다.

오늘은 다행히 이야기가 그 방향으로 가진 않았다. 건강은 건강이었다. “너무 좋은 머리예요, 복 받으셨네요.” 심지어 복이었다. 타고난 줄도 모르고 사십 년을 훌쩍 넘도록 살다가 되찾았으니 아닌 게 아니라 복이 맞다.


어릴 때부터 새카맣고 곱슬기 있는 머리라 촌스럽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 이십 대에는 아줌마 파마했냐는 소리, 염색을 왜 촌스럽게 까만색으로 했냐는 소리를 웃어넘길 정도가 되었다. 관리 좀 해라, 여자애가 머리가 그게 뭐냐, 그때는 여자라서 이런 얘기를 듣다니,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여자라서가 아니었고 이제는 ‘나이 들어서’ 관리해라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 머리에서 나고 자라는 털은 사십 년 전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 한데 처음으로 복이라는 말을 들으니 지금껏 내 골치를 아프게 했던 말들이 다시 머리를 툭 툭 친다. 촌스럽다, 예쁘다, 건강하다, 여자, 나이, 관리,.. 말은 입에서 나와 어떤 대상에게 도달하는 순간, 자체의 뜻을 잃고 다른 의미를 입는다. 나는 의미가 아닌 의도를 받는다.


같은 사물을 두고 같은 말을 사용해서 하는 말의 의미가 모두 다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딱 골치가 아프다. 말하는 게 무섭다. 듣는 것도 무섭다. 내가 저 사람의 말을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이렇게 끝이 안 난다. 그럼 입을 닫고 살아? 그러자니 너무 심심할 것 같다. 오케이, 여기까지. 인사치레든 뭐든, 평생 좋은 소리 못 듣다 딱 한 번 들은 긍정의 말은 기분 좋은 환기가 됐다. 그걸로 됐다. 해야 할 말이라면 담백하게 하자. 말에 감정이니 의도니 잔뜩 짐 지우지 말고. 없어도 그만인 머리털 얘기 아니라도 골치 아픈 일은 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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