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불쾌에 맞았을 때
합리화라는 말은 언제부터 논리가 되었을까. 합리화를 위해 없던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옳지 않거나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위와,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이미 일어났거나 존재하는 ‘사실’까지, 도식에 억지로 구겨넣게 된 걸까. 우리는 과학이라는 말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을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궁금하다. 나의 감정이나 욕구의 원인이 정말 ‘그것’이라면, 명확히 알게 된다면 도움이 될까?
사람이 무서울 때가 있었다.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너무 쉽게 상처를 입었다. 인생의 어느 한 찰나, 흔적도 없이 지나쳤어야 할 사람. 잠시 스치는 사람에게 입은 상처는 대수롭지 않아서 울고 싶게 아프다. 풀밭을 기분 좋게 걷다 맨다리를 베인 것처럼, 별 것 아니어서 더 쓰리고 오래 서운해 며칠이고 울적해진다.
자가용이 있으니 버스나 택시 탈 일이 자주 없다. 그래서 다행이다. 많은 기사들이 불친절하다. 직업상의 특성이라는 듯. 버스를 타는 굼뜬 노인들, 캐리어를 든 젊은이들에게 빨리 타라고, 어서 들어가라고, 미리 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혼을 낸다. 어디로 가 달라는 택시 손님에게 주소가 불분명하다고, 길이 너무 외지다고 투덜댄다. 도착해서 만난 지인에게 하소연도 않는 게 좋다. 가끔 그들은 세상 관대한 사람이 되니까. 기사업무가 얼마나 힘든지, 같은 말을 수천 번 하면서 하루종일 승객들에게 시달리는 감정노동이 얼마나 막대한지 설파하니까. 불쾌해진 기분조차 내가 무례하고 이해심 없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니까. 그런데 새똥 맞았다고 생각하며 잊어버리려 해도 잘 안된다. 냄새가 머리카락에 계속 달라붙어 있는 거 같다.
쓰레기에 대한 강박 비슷한 게 있다. 버려야 할 물건을 두고 보지 못한다. 현관에 내어놓고 오후 세 시가 되길 기다린다. 월 수 금은 플라스틱, 화 목은 종이류, 캔과 병은 매일 버려도 된다. 현관에 쓰레기가 하나도 없을 땐, 몇 시간뿐이지만 기분이 시원하다. 그런데 요즘은 저녁이 되도록 쓰레기 버리는 걸 미룬다. 내일 아니 모레로 미루기도 한다.
신경 쓰이는 일, 아니,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클린하우스에 관리하는 아주머니가 생긴 거다. 어느 날 페트병 몇 개랑 캔 두어 개를 버리러 갔다. 뭐예요? 플라스틱이랑 캔인데요. 이렇게 버리면 안 돼요, 다음엔 하얀 (비닐)봉투 큰 거에 넣어 오세요. 몇 개 안 되는데요? 그래도요. 나한텐 쓰레기를 포장해서 버리라는 말로 들렸다. 숙박업소나 장삿집도 아니고 가정집에서 쓰레기가 나와 봐야 얼마나 나온다고? 큰 봉투를 채울 만큼 기다렸다 한꺼번에 버리라는 말인가? 그러기 싫으면? 그리고 하얀 봉투는? 재활용 쓰레기 포장용으로 또 봉투를 구입하라는 건가? 전부 속으로만 말했다. 불쾌가 말에 묻어 나올 거 같았다.
그날 이후로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마다 비슷한 말을 들었다. 이렇게 버리지 마세요. 봉투에 넣어 오세요. 끈으로 묶어 오세요. 더 깨끗이 씻던가 종량제 봉투에 넣어 버리세요. 대충 네, 네 하며 넘기다 이거 도로 가져가세요, 하길래 비닐은 재활용이 되지 않냐고 대꾸를 했다. 안 된단다. 왜? 재활용으로 분리 배출하래서, 콩떡같이, 씻어서 말려서 모아 왔는데? 안 통한다. 종량제 봉투에 버리란다. 말의 내용도 납득이 안되거니와, 반말로 빈정대는 말투에 화가 터지고 말았다. 들고 돌아섰다. 집에 있던 P에게 이제 쓰레기는 당신이 좀 버리라 했다.
그 아주머니가 문제인 게 아니다. 비슷한 경우가 제법 있었다. 클린하우스에 갔다가 누군가 앉아 있으면 그냥 들고 돌아오는 일. 잔소리보다 하소연이 듣기 불편했다. 그거 버리지 마세요. 거기에 버리면 안 돼요. 그렇게 하지 마세요. 안돼요. 잔소리로 시작해서 기다린 듯한 한탄으로 흘러간다. 다들 엉망으로 해놓고 간다고. 내가 다 치워야 한다고. 일이 너무 많다고. 힘들어 죽겠다고.
물론 힘들 거다. 기본적인 매뉴얼만 지켜도 수고를 덜어줄 수 있을 테고, 매뉴얼을 지키지 않아 그들의 업무를 한층 수고롭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을 테다. 그들에게 바른 분리배출 방법을 알려 주느라 같은 말을 수천 번 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겠고.
한데 그 스트레스는 업무에서 파생된 거다. 그러니까 스트레스까지 포함해서-처리하면서-, 쓰레기를 분리하고 사람들에게 분리배출의 매뉴얼을 알려주는 게 그의 일이다. 그 일이 힘든 건 알지만, 내가 이해를 하건 못 하건 그의 스트레스에 공감을 하건 못 하건 자기의 일을 하다 생긴 불쾌를 내게 옮길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내가 고의적으로 일을 늘리거나 그를 힘들게 했다면 모를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모든 감정이나 욕구에도 원인과 목표가 있다는 생각은 참일까. 연쇄살인범의 심리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살인의 동기를 타인의 탓으로 돌렸다. 애인이 나를 버려서,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서, 타인이 나를 무시해서, 사회가 나를 외면해서.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그래서 쌓인 울분과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했노라고. 살인이라는 결과의 원인은 외부에 있고 자기 또한 희생자라고 했다.
살인은 극단적인 예긴 하지만, 사고의 함정에 빠지는 건 범죄자나 정신이상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덫에 걸려 있다. 원인을 찾으려는 강박, 감정과 행위의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는 강박에 붙잡혀 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말은 대개, 저런 말과 행동을 하는 이유를 내가 ‘알고 있다’는 착각이다. 대리운전 기사가, 도서관 매점 직원이, 클린하우스 아주머니가 불친절하더라는 말에, 많은 이들이 그들의 노고와 내 이해심을 들먹이는 대꾸를 했다. 나 역시 대꾸한다. 그들이 힘들게 일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한 꼴을 당한다는 걸 알지만, 그 불쾌한 꼴을 내게 돌려도 좋다는 이유는 될 수 없다고. 타인의 불쾌가 내 불쾌의 ‘원인’일 수 없고, 혹 그게 가능하고 내가 그의 불쾌를 ‘이해’한다고 해도, 내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고. 연쇄살인범에게 원한의 이유나 사회적 원인 같은 건 없었다. 그들은 ‘그냥’ 사람을 죽였다. 나는 현관의 쓰레기를 볼 때마다 불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