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에서 글쓰기
복선이었나 보다. 어제 오후, 섬 반대편으로 갔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려는데 차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몇 분 후에 한 번, 몇 분 후 또 한 번 키를 돌려봤다. 방전은 아니고, 점화플러그도 정상적인데 차는 격렬히 경련하다 잠잠해졌다.
크게 당황하는 법도 없이, 아아 이제 수명이 다한 건가, 그래도 그렇지, 지금껏 이런 적은 없었는데 왜 하필 지금이람, 짐도 있고 섬 반대편인데, 푸념했다. 옆에 앉은 동생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런데.
결론. 멍청하고 초보적인 실수였다. 내 차는 오래된 LPG차라 가스 공급 버튼이 있다. 육지 살 땐 겨울에 가스를 빼놓는 게 필수였다. 그래야 차가 얼지 않는다. 최근에는 건드릴 일이 없어 늘 켜진 채로,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확실히 눌려 있어야 할 이 버튼이 반쯤 튀어나와 있었다. 큰짐을 싣느라 앞의자를 당길 때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애먼 붕붕이를 탓해서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래도 너무 다행이라고, 행운의 동전을 주운 기분으로 돌아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데 ㅅ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손에 짐이 있어 잠시 고민하다 받았는데, 그러길 잘했다. 내 책을 읽다가 전화가 하고 싶어졌다고 했다. 이런 구절이 있더라구요, 저런 구절도 좋더라구요, 어쩜 이렇게 제주말도 잘 써요, 너무 잘 읽고 있어요..
“글의 힘이 이런 거구나, 생각했어요.”
우와..울 뻔했다. 들어주는 이가 있구나, 그 글들이 그냥 흩어지지 않았구나, 일 년치 선물을 미리 다 받은 기분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운을 만끽할 새도 없이 바로 전화가 온다. 이번엔 모르는 번호다. 죄송합니다, 제가 차를 박았어요..엥? 나, 바로 옆에 서 있었는데?
글 얘기에 빠져 있는 사이, 서툰 허씨 운전수가 차를 긁었다. 여기, 그러니까 내 집 앞 주차장에서만 서너 번째다. 허씨 하씨 호씨 일가들은, 운동장만큼 넓은 공간을 두고 왜 구석진 데를 찾아가 부딪치는지 미스테리다. 내가 낸 상처 하나 없이 붕붕이는 점점 줄무늬가 되어가는 중이다. 네에..몇 줄 더 그으셨네요, 됐습니다, 그냥 가셔요.
차유리 앞에 놓는 인형처럼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대는 젊은 커플에게, 여행 잘 하세요, 해주고 들어왔다. 직전에 받은 전화에 마냥 행복하고 너그러워진 건 아니다. 사는 게 참 다이내믹하다니까, 재밌는 날이네, 그랬다.
아침에 눈 뜨니 현택훈 시인한테 문자가 와 있다. 책 재밌네요, 하며 기사링크를 보내주었다. 와, 어제가 끝이 아니었네? 내년 선물까지 땡겨 받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이쯤 되면 좀 무섭다. 이번엔 무슨 일이 있으려고 그러지?
도리도리. 조금 늦게 도착한 거야. 좋은 소식이 더 좋은 소식을 데려올 거야. 그렇게 생각할 거다. 내 글들은 나 닮아 간세가 많은가 봐, 다른 글들 불러오라고 보낸지가 언젠데, 안 돌아오네, 그런 말 안 할 거다. 나 닮은 건 맞다. 경호난 걸음이 이추룩 느린 거다. 그래도 왔잖아. 세상의 모든 글쓰는 그대들. 홀로 외로이 글을 배웅하는 그대들, 힘내시라. 글은 틀림없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