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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수 May 15. 2022

백만 번의 지긋지긋함과 한 번의 사랑

사노 요코, <100만 번 산 고양이>




100만 번 산 존재는 무엇을 사랑할 수 있을까? 100만 번 산 인간은? 100만 번 산 고양이는?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2002, 비룡소)의 주인공인 얼룩무늬 고양이는 무엇에도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단 한 번도 울지 않고 100만 년을 살았으니 당연히 그렇겠거니 싶지만, 이야기들이 이어질수록 그는 이렇게까지 삶을 싫어해야만 하나 싶을 정도로 부정적인 감정만을 안고 있는 고양이다. 고양이는 임금님을 싫어했다. 자신의 죽음에 애도하다 전쟁을 그만두기까지 한 임금님을! 그것뿐인가? 그는 자신에게 어떠한 해를 끼치지 않은 바다도, 서커스도, 할머니도, 어린 여자 아이도 싫어했다.


그럼 고양이는 무엇을 좋아할까? 멋진 얼룩무늬를 가진 자기 자신을 좋아했다. 그래서 어떤 고양이들이 구애를 하고 선물을 전해도 심드렁할 뿐이었다. 백만 번이나 죽고 살고, 백만 년이나 죽고 살아 보았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세상 모든 로맨스나 미의 기준 따위가 그의 마음에 들어찰 리 있는가!


그것이 전부라니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게도 사랑이 나타난다. 새하얗고 예쁜, 조용하고 무심한 고양이. 얼룩무늬 고양이는 처음엔 자기 자신에게 응당 비춰야 할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하얀 고양이에게 괘씸함을 느낀다. 무심함에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하고.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그는 계속 하얀 고양이에게 다가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뻐긴다. 100만 번이나 살았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우쭐댄다. 그렇게 싫었던 서커스단의 경험까지도 내세워 허세를 부리지만 하얀 고양이는 여전히 조용했다. 자신과 함께하고 싶어 안달을 내던 다른 고양이들과는 어딘가 달랐다.


얼룩무늬 고양이는 ‘자신’이 좋았지만, 100만 번 사는 동안 자신보다 더 중요한 건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자신보다 더 궁금한 상대를 위해서라면 무엇도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난 백만 번이나…….”
하고 말을 꺼냈다가 고양이는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라고 하얀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하얀 고양이는
“으응.”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 늘 붙어 있었습니다.

 - 100만 번 산 고양이 중에서.


하얀 고양이와 새끼를 낳고, 다시는 자신의 놀라운 백만 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오래오래 조용히 함께하다가, 하얀 고양이의 죽음을 겪은 얼룩무늬 고양이는 백만 년의 삶에서 처음으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는 하얀 고양이 옆에 멈추어 다시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 좋아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백만 번 산 고양이에게는 수많은 사연이 있을 테지만, 그 많은 사연이 고양이가 무엇인가를 ‘좋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을 것만은 분명하다. 아픔을 겪어 방어적으로 되었다기보다는 내가 가지지 않은 한계에 부딪치며 스러져버리는 존재에 대한 비웃음이리라. 그들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고양이와는 다르게 너무도 빨리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곤 하니까. 사라지는 것을 애정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얼마나 덧없는 일인가? 그것은 너를 절대 믿지 않겠다는 불신의 선언이라기보다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불확실에 가깝다. 불확실이 두려운 고양이는 사랑과 긍정을 피했다.


이렇게 다른 존재를 애정하지 않았기에 얼룩무늬 고양이는 멋진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멋있는 존재인지를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마음에 도취 되어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영영 그렇게 무엇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삶을 사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그것이 수많은 자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얀 고양이는 무언가 대단한 일을 벌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얼룩무늬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다. 멋진 일을 하거나 자신을 추앙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 없는 사랑이다. 얼룩무늬 고양이는 그제야 어디엔가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한다. 불확실이 두렵고 못마땅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상대가 자신에게 열렬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대도, 사랑하니 곁에 있고 싶고, 그 존재와 일상을 나누고 싶게 된 것이다.


얼룩무늬 고양이가 백만 번 죽고 살 때마다 그를 사랑한 인간들은 눈물을 흘렸다. 고양이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싫어했다! 하지만 인간들은 그를 사랑했고, 눈물을 흘렸고, 그를 기억하고 어쩌면 그 사랑의 기억으로 어떤 순간들을 살 것이다. 전쟁을 끝낸다거나, 위험한 일을 그만둔다거나, 크고 작은 일들을 ‘자신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고양이 덕분에 결정할 것이다. 삶은 그런 식으로 구성된다.


2022년 한국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피로감이 얹혀 있다. 매일 저녁 뉴스에는 그닥 즐겁지 않은 이야기들만이 가득하고, 내일의 나는 어떤 세상을 살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불확실의 스트레스가 더욱 더 무거워지고 있다. 오늘 하루는 대체 어떻게 살았는지, 내일은 어떠할지 같은 반복되는 고민이 있다. 사소한 짜증과 걱정. 우리는 그것들을 삭제하거나 눈 앞에서 사라지게 할 수 없다. 지겹고 힘들다 말하면서도 당신을 미소를 짓게 하는 것을 찾는 것만이 피로감을 이기고 삶을 지속할 수 있게 돕는다.


어떤 합당한 이유가 따로 있지 않은데도 결국은 당신의 마음을 쉬게 하는 것. 로맨스 상대일 수도, 한 폭의 그림일 수도, 조용한 음악일 수도, 어떤 과거의 대화일 수도 있다. 거대한 힘을 가진 그것은 언젠가는 분명히 찾아온다. 백만 년이 넘게 걸린 고양이처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도 말이다. 백만 번의 지긋지긋함과 한 번의 사랑. 가느다란 바람처럼 찾아온 사랑이더라도, 드라마처럼 화려하고 강렬하지 못한 사랑이더라도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한다. 그것이 백만 번의 고난에도 당신을 제자리에 버티고 서있을 수 있게 돕는 지표가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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