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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밤

산문

by 잎차

여름, 밤. 바람은 찬찬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살고 싶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휘몰아치고 싶었다. 태풍이 되어 세상을 휩쓸고 싶었다.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누군가의 더위를 식혀줄 실바람이, 땀을 흩을 옅은 손길이라도 되고 싶었다. 하지만 바람은 그 무엇도 되지 못했다. 그저 공기에 불과했기에.


바람이 불려거든 공기의 온도 차가 필요하다. 어딘가는 뜨거워야 하고 다른 어딘가는 그보다 추워야 한다. 그러나 바람의 세상은 너무나도 평이했다. 습하고 끈적하고 미지근했다. 한 때 무더웠고, 또 한 때 얼어붙을 듯 춥던 세상이 미지근히 식는다. 그 온기에 바람은 갈 곳을 잃었다. 예정된 일이었다.


밤공기가 미지근하다. 세상에 의지할 불빛이 없다. 구름 낀 하늘엔 별이 없고 내려다 본 세상엔 빛이 없으니 세상은 서늘한 기온조차 못 된다.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도. 세상은 이 미지근한 기온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옅은 간극에서 바람은 공기의 흔들림조차 되지 못하리라.


여름은 본디 생명에게 매정한 계절이다. 태양의 열기가 세상을 덮을 때, 산 것들은 열기를 식힐 무언가를 갈구한다. 태양의 열기가 조금 사그라들면 산 것은 흐른 땀을 말려줄 무언가를 찾는다. 그러나 밤, 이 끝나지 않는 밤의 지속에는 무엇도 필요 없다. 이슬조차 맺히지 않아 울 수 없다. 바람은 앞으로의 일을 알고 있었다.


세상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태양이 산 너머로 넘어갔다. 이 밤, 더는 더울 수도 추울 수도 없는 밤. 이 밤에 더는 바람은 필요 없다. 다시 떠오를 태양이 없는 탓이다. 그 빛이 영영 사그라 든 탓이다. 설령 언젠가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는 바람이 필요 없다. 세상에는 바람을 대체할 것이 너무 많다. 바람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만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더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세상이다. 바람을 불게 할 어떤 기온도 남지 않은 세상이다. 무릇 밤이란 것이 그러하듯.


마지막으로, 아주 마지막으로 바람은 한 걸음을 옮겼다. 공기가 흔들린다. 세상의 마지막 바람이 옅게 불었다. 그게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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